[[분류:기원전 2세기 집정관]][[분류:로마 공화국 집정관]][[분류:로마 출신 인물]] [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기원전 2세기)] ||||<#800080> {{{#ffffff {{{+3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케테구스''' }}}[br]{{{-1 [[라틴어]]: Marcus Cornelius Cethegus }}} }}} || ||<#800080> {{{#ffffff '''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160년 이후|| ||<#800080> {{{#ffffff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800080> {{{#ffffff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800080> {{{#ffffff '''지위''' }}} ||[[파트리키]] || ||<#800080> {{{#ffffff '''국가''' }}} ||[[로마 공화정]] || ||<#800080> {{{#ffffff '''가족''' }}} ||가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케테구스(조부)[br]가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케테구스(아버지) || ||<#800080> {{{#ffffff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800080> {{{#ffffff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800080> {{{#ffffff '''임기''' }}} || 기원전 160년 || ||<#800080> {{{#ffffff '''전임''' }}} ||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기원전 161년 집정관)|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br][[가이우스 판니우스 스트라보]] || ||<#800080> {{{#ffffff '''동기''' }}} || [[루키우스 아니키우스 갈루스]] || ||<#800080> {{{#ffffff '''후임''' }}} ||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기원전 159년 집정관)|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br][[마르쿠스 풀비우스 노빌리오르(기원전 159년 집정관)|마르쿠스 풀비우스 노빌리오르]] ||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생애 == [[고대 로마]]의 저명한 [[파트리키]] 가문인 [[코르넬리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기원전 5세기부터 [[아우구스투스]] 통치 시기까지 이어지는 로마 공화국의 최고 행정관 목록을 담은 [[파스티 카피톨리니]](Fasti Capitolini)에 따르면, 그의 조부와 아버지 모두 가이우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한다. 기원전 197년 집정관 가이우스의 조부 역시 마르쿠스였다. 학자들은 두 케테쿠스가 할아버지를 공유했으며 서로 사촌 관계라고 추정한다. 일각에서는 기원전 197년 집정관 [[가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케테구스]]가 그의 아버지라고 추론하지만, 고대 사료에서는 가이우스의 아들로 기원전 150년 [[루시타니아 전쟁]]에서 루시타니아인들에게 토지를 분배하겠다고 속이고 유인한 뒤 몰살시키는 만행을 저지른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기원전 144년 집정관)|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를 처벌하는 데 찬성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케테구스만 언급했기 때문에 분명하지 않다. 기원전 171년, 갈리아 키살피나 방면을 담당하고 있던 집정관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가 [[페르세우스(마케도니아)|페르세우스]]와의 전쟁을 단행하기 위해 임지를 떠나 마케도니아로 이동했다. 원로원은 이 소식을 듣고 그와 푸블리우스 마르키우스 렉스, 마르키우스 풀비우스 노빌리오르 등 3명을 롱기누스에게 보냈다. 이들은 일리리아에서 롱기누스를 따라잡고 "원로원의 결정에 의하지 않고는 어떤 적과도 전쟁을 시작해서는 안 된다는 지령을 전달했다. 결국 롱기누스는 마케도니아 왕국과의 전쟁을 포기하고 갈리아 키살피나로 돌아갔다. 기원전 169년 식민도시에 로마인들을 이주시키는 임무를 맡은 위원회의 일원이 되었다. 위원회는 로마인 1,500명을 최근에 베네티 일대에 건설된 [[아퀼레이아]]에 이주시켰다. 기원전 163년 이전에 법무관을 역임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기원전 160년 [[루키우스 아니키우스 갈루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된 뒤 라티움 일대를 배정받고 라티움 남부에 있는 폰티누스 습지의 물을 빼고 농경지로 적합하게 만들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