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1세기)] |||| {{{+3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br]{{{-1 [[라틴어]]: Marcus Junius Silanus }}} || || '''생몰년도''' ||기원전 26년 ~ 서기 37년 || || '''출생지''' ||[[로마 제국]] 이탈리아 [[로마]] || || '''사망지''' ||[[로마 제국]] 이탈리아 [[로마]] || || '''지위''' ||[[파트리키]] || || '''국가''' ||[[로마 제국]] || || '''가족''' ||가이우스 유니우스 실라누스(아버지)[br]아티아(어머니)[br]데키무스 유니우스 실라누스(동생)[br]마르쿠스 아티우스 발부스(외조부)[* [[소 옥타비아]], [[아우구스투스]] 남매의 외삼촌으로, 이들 남매의 어머니 아티아의 남자형제이다. 혈연상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조카이다.][br]클라우디아(외조모)[* [[리비아 드루실라]]의 친척으로, [[클라우디우스]] 일족 중 가장 위세 높은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가 출신이다.][br]이름 미상의 아내(아내)[br]유니아 실라나(장녀)[br]유니아 클라우딜라(차녀) || || '''직업''' ||[[로마 제국]] 원로원 의원 || |||| '''로마 제국 집정관''' || || '''임기''' || 서기 15년 보결 ||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제국]]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시대의 원로원 의원, 집정관. 2대 황제 [[티베리우스]]의 오랜 친구이자 최측근, 3대 황제 [[칼리굴라]]의 첫 아내인 유니아 클라우딜라의 아버지로 칼리굴라가 서기 37년 숙청 전까지 아버지처럼 따른 인물이다. 온화한 성품으로 유명했지만, 서기 37년 모종의 황제 암살 미수 사건이 벌어지고 [[티베리우스 게멜루스]]가 숙청된 뒤, 11월 혹은 12월 반역 혐의로 처형됐다. == 생애 == 노멘에서 드러나듯이, 로마 건국 당시부터 내려온 유서 깊은 유니우스 일족의 지파 실라누스 가문 출신이다. 조상, 친척 중 동명이인이 많은 까닭에 '''마르쿠스 유니우스 C. f. M.n. 실라누스'''라고 표기해 구분한다. 마르쿠스 유니우스 C. f. M.n. 실라누스로 표기되고 설명되듯이, 할아버지는 기원전 25년 집정관을 지낸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기원전 25년 집정관)|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아버지는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의 아들인 원로원 의원 가이우스 유니우스 실라누스이다. 어머니는 종신독재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외조카로,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어머니 [[아티아]]의 남자형제인 원로원 의원 마르쿠스 아티우스 발부스의 딸 아티아이다. 어머니 아티아는 발부스가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가문 출신인 아내 클라우디아와의 사이에서 얻은 딸로, 고모 아티아와 구분하기 위해 종종 마르쿠스의 딸 아티아라고도 불린다. 친척으로는 종종 가이우스 유니우스 실라누스로도 알려진 서기 28년 집정관 아피우스 유니우스 실라누스가 있다. 외조부가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외삼촌이고, 외조모가 [[리비아 드루실라]]의 아버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클라우디아누스]]와 친척인데다, 아버지가 옥타비아누스로 불릴 때부터 아우구스투스를 지지한 까닭에, 일찍부터 아우구스투스 부부에게 여러 후원을 받았다. 하지만 형제인 데키무스 유니우스 실라누스는 서기 7년경 아우구스투스의 양손자 [[클라우디우스 1세]]를 경기장에서 신기한 동물 보듯이 관찰하면서 비웃은 것이 아우구스투스의 심기를 건드린 뒤, 혈육을 아낀 아우구스투스에게 진노를 샀고, 다음해인 서기 8년 [[소 율리아]]와 간통했다는 혐의로 황제에게 직접 고발당해 추방됐다. 이때 아우구스투스는 증거 없는 보복임을 알고 있고, 마르쿠스 실라누스가 후계자 티베리우스의 가장 친한 친구임을 감안해, 이례적으로 데키무스 실라누스에게 선택권을 주면서 재산 몰수, 원로원 의석 박탈 없이 자진 망명 형태로 이탈리아를 떠나 살게 했다. 어릴 때부터 리비아 드루실라의 장남인 [[티베리우스]]와 절친한 사이였고, 티베리우스보다 10살 넘게 어렸지만,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은 티베리우스와는 일평생 친구였다. 그는 고대 기록들에 나오듯 매우 존경받은 로마귀족 중 한명이었다. 따라서 티베리우스는 항상 코케이우스 네르바[* 네르바 황제의 할아버지로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보다 나이가 많았고, 요절한 마르켈루스, 티베리우스 황제와는 아주 어릴 때부터 단짝 친구였다.]와 함께 마르쿠스 실라누스가 내린 사법 결정이나 조언이라면 검토하지 않고 모두 통과시켰고, 자신의 결정을 재고하고 반박하는 것을 특별히 허락했다. 따라서 마르쿠스 실라누스는 서기 14년 아우구스투스가 죽고 티베리우스가 황제로 등극하자마자, 추방된 형제 데키무스 실라누스를 사면해달라고 읍소해, 데키무스를 귀국시켰다. 그러나 티베리우스는 데키무스 실라누스에게 모든 선출직을 금지시켰고, 원로원 회의에는 이름만 올리는 선에서 정치적 은퇴를 명했다. 이름 미상의 아내와의 사이에서 유니아 실라나, 유니아 클라우딜라라는 두 딸이 있었다. 이중 차녀 유니아 클라우딜라는 서기 33년 티베리우스 황제의 주선으로 [[게르마니쿠스]], [[대 아그리피나]]의 막내아들인 [[대 드루수스]], [[소 안토니아]]의 손자 가이우스([[칼리굴라]])와 결혼했다. 유니아 클라우딜라는 칼리굴라가 티베리우스의 개인 보호 조치 아래 카프리 섬의 빌라 요비스로 거처를 옮길 때 함께 떠났는데, 서기 36년 18세의 나이에 폐쇄적인 카프리 섬에서 아이를 낳다가 산고로 죽고, 갓 태어난 아이마저 얼마 안 가 죽었다. 하지만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큰형, 작은형이 줄줄이 [[세야누스]]의 음모로 숙청된 칼리굴라는 장인 마르쿠스 실라누스를 아버지라고 부르며 따랐고, 마르쿠스 실라누스는 칼리굴라를 아들처럼 대했다. 그러나 이 관계는 칼리굴라가 즉위한 뒤, 원로원 의원 일부가 벌인 두 번의 황제 암살 미수 사건 이후 뒤틀리게 됐다. 따라서 서기 37년 11월 혹은 12월, 칼리굴라는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를 기소해 반역혐의로 처형했다. 이 사건에 대해, 수에토니우스는 마르쿠스 실라누스가 칼리굴라를 상대로 음모를 꾸몄다가 들통이 나면서 처형됐다고 한다. 반면 동시대 사람 필로는 칼리굴라가 모종의 알 수 없는 이유로 짜증이 났고, 이후의 일련의 일 때문에 이 사건이 벌어졌다고 적고 있다. [[분류:1세기 집정관]][[분류:로마 출신 인물]][[분류:로마 제국 집정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