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기원전 1세기)] |||| {{{+3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br]{{{-1 [[라틴어]]: Marcus Junius Silanus}}} || || '''생몰년도''' ||미상 ~ 미상 || || '''출생지''' ||[[로마 공화국]] || || '''사망지''' ||미상 || || '''지위''' ||[[노빌레스]] → [[파트리키(계급)|파트리키]] || || '''국가''' ||[[로마 공화국]] → [[로마 제국]] || || '''가족''' ||[[데키무스 유니우스 실라누스]](아버지)[br][[세르빌리아]](어머니)[br]유니아 프리마(누이)[br]유니아 세쿤다(누이)[br]유니아 테르티아(누이)[br][[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이부 형제)[br]만리아 토르콰타(아내)[br]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아들)[br]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토르콰투스(손자) || || '''참전''' ||[[무티나 내전]] || || '''직업''' ||[[로마 제국]] [[집정관]] || |||| '''로마 제국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5년 || || '''전임''' || [[아우구스투스]][br][[티투스 스타틸리우스 타우루스]] || || '''동기''' || [[아우구스투스]] || || '''후임''' || [[아우구스투스]][br][[가이우스 노르바누스 플라쿠스(기원전 24년 집정관)|가이우스 노르바누스 플라쿠스]] ||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공화국]]과 [[로마 제국]]의 군인, 정치인. [[무티나 내전]] 시기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편에 섰고, [[시칠리아]]에서 할거하던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에게 망명했다가 미세눔 협약 후 안토니우스에게 돌아갔다. [[악티움 해전]] 이전에 [[옥타비아누스]]에게 귀순한 뒤 기원전 25년 [[집정관]]을 역임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암살자로 유명한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의 이부 형제다. == 생애 == 기원전 62년 [[집정관]]을 역임했으며, [[루키우스 세르기우스 카틸리나]] 반역 음모 사건 때 "우선 피고인들을 임시 구금한 뒤 정식 재판을 거쳐 종신형에 처하자"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주장을 지지했던 [[데키무스 유니우스 실라누스]]의 아들이다. 어머니 [[세르빌리아]]는 저명한 귀족 집안 출신의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의 딸로, 첫 남편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결혼해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를 낳았고, 남편과 사별한 뒤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재혼해 그와 세 딸 유니아 프리마, 유니아 세쿤다, 유니아 테르티아를 낳았다. 유니아 프리마는 기원전 48년 집정관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이사우리쿠스]]와 결혼했고, 유니아 세쿤다는 훗날 제2차 [[삼두정치]]의 일원이 된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결혼했으며, 유니아 테르티아는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와 결혼했다. 기원전 53년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부관으로서 [[갈리아 전쟁]]에서 활약한 부관 '실라누스'가 그라는 설이 제기되었으나, 프리드리히 뮌처(Friedrich Münzer)는 동명이인이라고 반박했다. 그가 기록에 확실히 등장한 때는 기원전 44~43년 [[무티나 내전]]이 벌어진 시기다. 당시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총독을 맡고 있던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의 부관이었던 그는 레피두스의 명령을 받들어 군대를 이끌고 무티나로 접근했다. 레피두스는 가능한 한 중립을 유지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실라누스에게 누구를 도우라는 지시를 별도로 내리지 않았다. 하지만 실라누스는 상관의 허락 없이 안토니우스 편에 서기로 하고, 기원전 43년 4월 그와 연합하여 [[옥타비아누스]]와 [[아울루스 히르티우스]], [[가이우스 비비우스 판사 카이트로니아누스]]를 대적했다. 안토니우스가 무티나 내전에서 패한 뒤 레피두스에게 달아날 때 함께 갔으나, 레피두스는 그가 자신의 허락없이 멋대로 행동했다는 이유로 직위해제 처분을 내렸다. 그 후 모종의 이유로 [[시칠리아]]에 할거하던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에게 망명했다가, 기원전 39년 미세눔 협약이 체결되면서 섹스투스의 보호를 받던 망명자들이 로마로 귀환하여 정계에서 활동할 수 있는 길이 열리자 즉시 로마로 돌아갔다. 이후 안토니우스의 부관이 되었고, 기원전 34년 [[유피테르]] 신전의 사제가 되었으며, 기원전 33년경 그리스에서 재무관으로 활동했다. 당시 그가 주조한 안토니우스의 주화가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견되었는데, 동전 뒷면에는 "M. Silanus aug(ur) q(uaestor) pro co(n)s(ule)"라는 문구가 새겨졌다.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이 벌어지기 전에 옥타비아누스에게 귀순했고, 기원전 30년 [[파트리키(계급)|파트리키]] 신분을 수여받았다. 기원전 25년 [[아우구스투스]]가 된 그가 9번째로 [[집정관]]에 취임했을 때 공동 집정관으로 선임되었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그는 만리아 토르콰타와 결혼하여 아들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를 낳았다. 마르쿠스는 별다른 공직을 맞지 못하고 일찍 죽었지만, 죽기 전에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토르콰투스를 낳았다.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토르콰투스는 19년에 집정관을 역임했으며, 아우구스투스의 외증손녀[* 아우구스투스의 외손녀 소 율리아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의 딸.] 아이밀리아 레피다와 결혼했다. 그는 아이밀리아 레피다와의 사이에서 5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그의 세 아들과 두 딸은 모두 폭군 네로의 손에 살해당하거나 누명을 쓴 뒤 유배되었다. [[분류:기원전 1세기 집정관]][[분류:로마 제국 집정관]][[분류:로마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