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로마 공화국 집정관]][[분류:기원전 3세기 집정관]][[분류:기병장관]][[분류:로마 출신 인물]] [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기원전 3세기)] [include(틀:역대 로마 독재관 및 기병장관)] ||||<#800080> {{{#ffffff {{{+3 '''마르쿠스 세르빌리우스 풀렉스 게미누스''' }}}[br]{{{-1 [[라틴어]]: Marcus Servilius Pulex Geminus }}} }}} || ||<#800080> {{{#ffffff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800080> {{{#ffffff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800080> {{{#ffffff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800080> {{{#ffffff '''지위''' }}} ||[[파트리키]] || ||<#800080> {{{#ffffff '''국가''' }}} ||[[로마 공화국]] || ||<#800080> {{{#ffffff '''가족''' }}}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조부)[br]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아버지)[br][[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삼촌)[br][[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형제)[br]마르쿠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아들) || ||<#800080> {{{#ffffff '''직업'''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800080> {{{#ffffff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800080> {{{#ffffff '''임기''' }}} || 기원전 202년 || ||<#800080> {{{#ffffff '''전임''' }}} ||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기원전 203년 집정관)|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br][[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 || ||<#800080> {{{#ffffff '''동기''' }}} ||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기원전 202년 집정관)|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 ||<#800080> {{{#ffffff '''후임''' }}} ||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기원전 201년 집정관)|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br][[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파이투스]] ||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공화국]] [[집정관]], [[기병장관]]. == 생애 == 고대 로마의 저명한 [[파트리키]] 가문인 세르빌리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조부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는 기원전 252년과 기원전 248년에 집정관을 역임하면서 [[제1차 포에니 전쟁]]에 참전했다. 아버지 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는 기원전 218년 법무관을 역임했으며, 삼촌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는 기원전 217년 집정관을 역임했고 기원전 216년 [[칸나이 전투]]에 참전했다가 전사했다. 형제로 기원전 203년 집정관, 기원전 202년 [[독재관]], 기원전 183년 [[폰티펙스 막시무스]]를 역임한 [[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가 있었다. 기원전 211년 스푸리우스 카르빌리우스 막시무스 루가가 사망하면서 공석이 생긴 [[아우구르]]에 선임되었다. 이후 [[한니발 바르카]]와의 전쟁에 수년간 참전해 용감한 전사로서 명성을 떨쳤다고 하며, 기원전 204년 수석 [[조영관]]을 맡아서 [[검투사]] 경기를 주관했다. 기원전 203년 선거를 주관하기 위해 선출된 독재관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막시무스]] 휘하 [[기병장관]]에 선출되었다. 선거 결과, 그는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기원전 202년 집정관)|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와 함께 집정관에 당선되었다. 두 집정관은 [[한니발 바르카]]와의 결정적인 전투가 기다리고 있는 아프리카로 가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불후의 명성을 챙기고 싶었다. 그들은 원로원에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너무 많은 명성을 챙기게 내버려두면 위험하다며, 제비뽑기를 통해 자신들 중 하나에게 아프리카 방면 [[임페리움]]을 맡기라고 요청했다. 민회는 스키피오가 원정군을 계속 지휘하게 하기로 결의했지만, 원로원은 제비뽑기를 통해 새로 뽑기로 했다. 그 결과 티베리우스가 아프리카 방면을 맡게 되었고, 그는 에트루리아 지방을 임지로 부여받았다. 기원전 202년 연말에 형제 가이우스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를 독재관으로 지명해 선거를 치르게 하고, 자신은 에트루리아로 가서 기원전 201년까지 통치헀다. 기원전 201년 로마와 카르타고 간의 평화 협정이 체결된 후, 스키피오의 퇴역병들에게 삼니움과 아풀리아의 토지들을 나눠주는 위원회의 일원이 되었다. 기원전 197년 캄파니아 해안 지대에 5개 식민도시를 조직하는 위원회의 일원을 맡아 3년간 활동했다. 이후 30여년간 별다른 언급이 안 되던 그는 기원전 167년 [[피드나 전투]] 이후 로마로 귀환한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가 [[개선식]] 거행을 요청했을 때 등장했다. 당시 파울루스의 [[트리부누스 밀리툼]]이었던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기원전 144년 집정관)|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는 병사들이 자신들에게 전리품을 별로 나눠주지 않고 국고에 대다수 전리품을 헌납한 것에 강한 불만을 품은 것을 이용해 병사들이 파울루스가 [[개선식]]을 치를 자격이 없으며 자신이야말로 개선식을 치러야 한다고 주장하게 했다. 이때 의원들 중에서도 나이가 지극히 많은 편이었던 그가 나섰다. 그는 대중 연설에서 파울루스가 개선식의 주인공이 되어야 하는 이유를 설파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승리한 수많은 결투를 종종 회상하고, 자신이 입은 명예로운 상처를 보여줬다. 그는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매우 용감한 전사로서 이름을 떨쳐 군인들 사이에서 많은 존경을 받았기에, 병사들은 쉽게 설복되었다. 그리하여 파울루스는 개선식을 허락받고 대규모 행사를 거행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아들 마르쿠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는 기원전 181년 트리부누스 밀리툼을 맡았고, 기원전 170년 폰티펙스를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