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리히텐슈타인 공)]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801647 0%, #a41b54 20%, #a41b54 80%, #801647)" {{{#ffd517 '''리히텐슈타인 가문 관련 틀'''}}}}}}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8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include(틀:군주 일람)] ---- [include(틀:리히텐슈타인 관련 문서)] }}}}}}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801647 0%, #a41b54 20%, #a41b54 80%, #801647)" '''{{{#ffd517 {{{+1 Haus Liechtenstein}}}}}}'''}}}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리히텐슈타인 왕실 국장.png|width=70%]]}}} || || '''창립일''' ||[[1608년]] || || '''창립자''' ||카를 1세|| || '''現 수장''' ||[[한스아담 2세]]|| || '''국가''' ||[[리히텐슈타인 공국]]|| || '''링크''' ||[[https://fuerstenhaus.li/|[[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width=20]]]] || [목차] [clearfix] == 개요 == [[리히텐슈타인 공국]]의 공가이다. 약 900년의 역사를 가진 가문이다. == 역사 == 오스트리아 [[빈(오스트리아)|빈]] 인근에서 발흥한 귀족 가문으로, 12세기 초 리히텐슈타인 가문의 시조인 후고 폰 리히텐슈타인이 가문의 세력을 점차 확장시켰고, 1608년 카를 1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마티아스(신성 로마 제국)|마티아스]]로부터 공위를 인정 받으면서 리히텐슈타인 공가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리히텐슈타인 가문은 신성 로마 제국의 귀족으로서 과거 [[합스부르크 제국]]에 속했던 현재의 [[오스트리아]], [[슬로베니아]], [[체코]] 등에 있었던 여러 지역에서 많은 영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황제의 직속 제후로서가 아니라 다른 제후의 봉신 자격으로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직속 제후'이어야만 하는 [[제국의회(신성 로마 제국)|제국의회]] 참가 자격에 해당되지 않았다. 이를 제국직속령(Reichsunmittelbarkeit)[* 영어로는 Imperial immediacy라 한다. 즉 제후와 황제의 중간에 다른 상급 제후를 거쳐야 하는 것이 아니라(medium) 황제를 직속 주군으로 모시는(immediate) 제후의 권리라는 뜻이다.]이라 하는데 당시 가문의 당주 [[한스아담 1세]]는 제국의회에 참가권을 가진 직속제후가 되기 위해서 당시 제국직속령이었던 [[파두츠]] 백작령(1699년)과 [[셸렌베르크]] 남작령(1712년)을 구입하였다. 이후 1719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가 이 셸렌베르크 남작령과 파두츠 백작령을 합쳐 공국으로 승격시켜주면서 리히텐슈타인 가문의 성씨를 따서 [[리히텐슈타인 공국]]이라 이름붙였다. 보통 유럽의 귀족 가문은 성씨를 자신들이 통치하는 영지의 명칭을 따서 짓는 경우가 많아 가문의 성씨를 영지인 리히텐슈타인 공국에서 따온 것이라 생각할 수 있으나 실제론 반대로 통치가문인 리히텐슈타인 가문의 성씨에서 리히텐슈타인 공국이라는 국호가 유래한 것이다. [[오스만 제국]], [[사우디아라비아]]와 같은 사례. 리히텐슈타인이라는 성씨 자체는 리히텐슈타인 공국이 아니라 오스트리아 [[빈(오스트리아)|빈]]에 있는 리히텐슈타인 성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이 성은 13세기에 상실되었다가 19세기에 복구하여 다시 가문의 소유가 되었다. 어쨌든 이로써 리히텐슈타인 가문의 안톤 플로리안 1세는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가 되었고, 공가는 리히텐슈타인 공국을 지배했지만 리히텐슈타인이 아닌 [[합스부르크 제국|오스트리아]]에서 활동했다. 이렇게 순전히 정치적인 이유로 얻은 영지라, 가문이 리히텐슈타인 공국만을 다스리게 된 현재 상황에 비춰보면 상당히 아이러니한 사실이지만 당시에는 상술했듯이 이미 [[보헤미아 왕국]]에 큰 영지를 가지고 있는 땅부자였던 리히텐슈타인 가문 입장에서는 산골에 쳐박힌 코딱지만한 리히텐슈타인 공국 따위는 제국의회 참가권을 제외하면 크게 부유하지도 중요하지도 않은 영지였기 때문에 가문원 중 1818년까지 리히텐슈타인 공국을 방문한 이가 없었다. 게다가 재위 중인 리히텐슈타인 공이 리히텐슈타인 공국을 처음 방문한 해는 공국 성립 후 100년이 훨씬 지난 1842년이였다. 물론 그나마 처음 방문을 한게 그때라는 거지 공가의 거처는 이후로도 오랫동안 오스트리아 빈에 거주했고 리히텐슈타인 공국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1741년 발발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때는 [[요제프 벤첼 1세]]가 리히텐슈타인 공으로서 오스트리아군 기병대를 이끌고 [[코투지츠 전투]]에 참전했다. 1938년에는 [[안슐루스]]로 인해 공가의 주무대였던 오스트리아에서 리히텐슈타인으로 이주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는 리히텐슈타인의 경제가 휘청이자 경제 회복을 위해 공가 소유의 예술품을 팔았다.[* [[https://www.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1812051800001|#]]] 상술했듯이 리히텐슈타인 가문이 현재의 체코슬로바키아 [[오파바]] 지역에 1,600평방킬로의 영지[* 리히텐슈타인의 10배에 달라는 크기의 땅이다.]를 소유하고 있었으나 해당 지역은 리히텐슈타인 가문이 직할통치를 하자않았기때문에 리히텐슈타인 본토와 달리 1918년 체코슬로바키아 독립이후에는 체코슬로바키아 령으로 넘어갔고, 제2차대전 종전 이후 [[에드바르트 베네시]]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의 베네시 포고로 인해 리히텐슈타인 공가의 영지를 [[체코슬로바키아 제3공화국|체코슬로바키아 정부]]에 전부 몰수당해서 공가의 영지는 [[미니국가]]인 현재의 [[리히텐슈타인 공국]]밖에 남지 않게 되었고 현재까지 리히텐슈타인 공국의 군주 가문으로 재위 중이다. == 현황 == 리히텐슈타인 가문의 현 당주는 리히텐슈타인 공국의 군주인 [[한스 아담 2세]]이다. 작위는 [[독일어]] 원어로는 Fürst라고 하며 한국에서는 [[대공]], [[공작(작위)|공작]], 공([[公]]), [[후작]] 등 여러 가지 번역어가 난립하고 있다. 번역 문제에 관해서는 [[작위/유럽#s-4.1.2]], [[프린스#s-4]], [[공작(작위)#s-2.4.2]], [[후작#s-2.4.2]], [[대공국#s-2.2]], [[공국#s-2]], [[후국#s-2]] 문서의 각 항목을, 통치 작위 Fürst에 관해서는 [[프린스#s-3.1.1]] 문서의 해당 항목을 참조할 것. 참고로 중국에서는 번역이 또 다른데, [[모나코]]와 함께 리히텐슈타인 '친왕국'으로 부른다. 공국 내에서는 가문의 영향력이 상당해서, 법안의 '''[[거부권]]'''이나 '''[[의회해산|의회의 해산권]]'''[* 오늘날 [[내각제]] 국가에서 [[국가원수]](군주나 대통령)가 거부권이나 의회 해산권을 가지고 있는 경우는 많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국가원수가 거부권을 행사하거나 독자적으로 해산 여부를 결정하는 경우가 드물다. 거부권은 사실상 행사하지 않으며, [[의회해산]]은 [[정부수반]](총리)이 사실상 해산을 결정하고 국가원수가 이를 최종 확인만 해주는 역할을 하거나, [[총리]]의 의회 해산 요청이 있을 때만 국가원수가 해산 여부를 결정할 수 있게 되는 식이다.]이 있는 등 제법 [[권력]]이 강한 편이다. 전 [[세계]] 왕실들의 권한이 날이 갈수록 축소되는 와중에[* [[스웨덴 왕국]]은 [[1974년]] 국왕의 [[작위]] 수여권을 비롯한 그나마 남은 형식상 권력마저 모조리 박탈했고, [[네덜란드 왕국]]도 [[베아트릭스 여왕]] 시절에 [[왕권]]이 크게 축소되었다.] 리히텐슈타인은 이례적으로 [[21세기]]인 [[2003년]]에 [[의회해산|의회 해산권]], 법관 임명권, 법률 거부권 등을 골자로 하는 [[왕권]] 확대 개헌안이 [[국민투표]]에서 [[국민]]의 지지를 받아 통과함으로 '''공가의 권한이 더욱 강화되었다.''' [[영국]]의 [[BBC]]에서는 이걸 두고 리히텐슈타인이 사실상 [[전제군주제]] 국가가 되었다면서 깠다.[* 굳이 따지자면 [[바티칸]]은 전제군주제에 더해 [[신권 정치|신정]] 국가이기까지 하다. 물론 리히텐슈타인이나 바티칸 같은 나라들은 아주 작은 [[소국]]들이어서 국제사회에서 별반 관심을 갖지 않는다. 거기다 바티칸은 [[교황령]] [[이탈리아 통일|멸망]]과 [[라테라노 조약|바티칸 건국]] 이래 지금에 이르기까지 일반 시민은 거주하지 않는 [[성직자]]만을 위한 국가였다.] 심지어 [[2012년]]에는 [[유럽연합]]에서 리히텐슈타인 가문의 왕권이 비민주적이라는 경고를 받아 다시 법안거부권을 박탈할 것인지 묻는 국민투표가 실시되었으나 80%에 가까운 리히텐슈타인 국민들이 공가가 법률 거부권을 가지는 것이 맞다고 지지했다. [[입헌군주제]] 중에서도 상징적인 왕실치고는 권한이 매우 많다. 영어 위키피디아에서는 리히텐슈타인 공가의 권한을 [[프랑스 대통령]]과 비견하였다. 재위중인 다른 [[유럽]] 왕실들이 [[왕위 계승의 법칙]]을 절대장자상속제로 속속 갈아타고 있는 중에도 고고하게 [[살리카법]]을 유지하고 있다. 이에 대해 유럽연합에서 바꾸라고 했지만[* 문제는 리히텐슈타인이 '''[[유럽연합]] 소속국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건 [[내정간섭]]으로 간주될 우려가 매우 높다.], 한스 아담 2세는 그 법이 리히텐슈타인 공국 성립 전에 만들어져서 내 마음대로 못 바꾼다고 말했다. 리히텐슈타인 가문은 계승법을 군주나, 정부, 의회에서 바꾸는게 아니라 가문 구성원 전체의 회의에서 결정한다. 문제는 이 집안은 직계후손부터 남초가 극심한 집안이라 어떤 방식으로 투표를 하든 계승법 변경은 부결될게 뻔하고 계승법을 바꾸는 내용이 통과했다고 쳐도 순위가 밀리는 후손들에게 보상을 해줘야 하는데 방계라인까지 다 재산을 퍼줘야 하는 골치 아픈 일이 더 생긴다. 또 남계 자손만으로도 계승권자가 50명이 넘어 계승법을 바꿔야 할 절박한 이유가 없기도 하거니와 현존하는 유럽 [[왕실]]은 정치적인 이유로 모계 계승 및 [[동군연합]]이 일상이었으나 이 가문은 역설적으로 [[가문]]이 작아서 계승권 견제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남계 후손이 많다. 가문 [[작위]]가 낮아서 [[귀천상혼]] 가드라인이 낮은 것도 도움이 됐다. 역대 [[https://en.wikipedia.org/wiki/Princess_of_Liechtenstein|리히텐슈타인 공비]]를 보면 [[슈탄데스헤어]] 출신도 몇 있었지만, 통치가문 출신은 같은 리히텐슈타인 가문 출신 1명 뿐이었다. 오히려 [[비텔스바흐 가문]] 출신인 현 공세자빈 조피가 급이 높다. 귀천상혼 한계선을 높게 잡은 여러 구 [[왕가]]들이 줄줄이 갈려나간 걸 생각해 보면 그리고 가톨릭에 충실하게 다산하는 편이기도 하고, 그렇게 늘어난 후손들의 남녀성비를 볼때 [[남초]] 현상이 심해서 오히려 현행대로 놔두는게 최선이다. 가문의 [[모국어]]는 [[독일어]]지만 [[영어]]와 [[프랑스어]]·[[이탈리아어]]를 기본적으로 한다. 가문이 사업을 해 번 [[돈]]으로 국가 [[예산]]의 상당 부문을 충당하는 등의 이유로 리히텐슈타인의 세율은 매우 낮다.[* 리히텐슈타인에 세금이 '없다'는 말이 있으나 전반에 굉장히 잘못 알려진 오류다. 심지어 [[국립고궁박물관]]에서 2018.12.05.~2019.02.10.에 걸쳐 열린 '리히텐슈타인 왕가의 보물' 전시회에서도 '[[세금]]이 없다'고 설명했다. 세율이 매우 낮은 편이기는 하나, 엄연히 [[법인세]], 개인소득세 등의 세금이 있다.] 이처럼 가문이 [[국가]] 예산에 상당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권한이 크고 국민들도 인정하고 있다. 한가지 예시로 리히텐슈타인 의회에서 [[낙태]]를 허용하는 법안을 통과시키자 공세자 겸 [[섭정]]인 [[알로이스 필리프 마리아]]가 보수 [[가톨릭]] [[귀족]]인 그의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는지 나라를 [[빌 게이츠]]에게 팔고 국명도 [[마이크로소프트]]로 바꾼 후 [[오스트리아]] 빈의 본가로 돌아가겠다고 위협했다. 리히텐슈타인은 공가의 가산으로 유지되는 나라라 결국 의회는 알로이스 공세자에게 굴복, 법안을 거부했다. [[https://www.nytimes.com/2003/03/15/world/in-liechtenstein-a-princely-power-grab.html|뉴욕타임즈 기사]]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리히텐슈타인, version=738)] == 공가의 재산 == 리히텐슈타인 공가는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왕실로 [[한스아담 2세]]는 76억 스위스프랑, 한화 9조원에 이르는 재산을 보유하고 있다.[* 영국 [[엘리자베스 2세]]가 보유했던 개인 자산은 4억 파운드, 한화 6000억원에 달했는데, 한스아담 2세는 이를 훨씬 뛰어 넘는 규모의 재산을 보유하고 있다.] 공가는 주식, 사모주식, 채권, 헤지펀드, 부동산, 사모대출, 보험 연계 등으로 분산 투자해 재산을 운영하고 있다. 또, 공가가 세계에서 가장 큰 왕실 소유 은행 중 하나인 프라이빗 뱅킹 그룹 LGT은행의 지분을 100% 소유하고 있다. 한스아담 2세의 차남인 막시밀리안 공자도 LGT가 운용하는 프린슬리 펀드로 높은 수익률을 기록하고 있다. 막시밀리안 공자 뿐만 아니라 현재 리히텐슈타인 공국의 섭정인 [[알로이스 필리프 마리아|알로이스]] 공세자도 공가의 재산 관리를 맡은 적이 있을 정도로 공가의 일원 대부분이 금융에 대해 매우 정통하다. 리히텐슈타인 공가가 자산을 분산시키는 것은 1938년 오스트리아를 병합한 [[나치 독일]]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로부터 오스트리아에 있던 리히텐슈타인 공가 소유의 부동산을 전부 몰수 당한 이후 확립된 자산을 안전하게 소유하기 위한 자산 운용 법칙이다.[* [[https://www.hankyung.com/finance/amp/2019112929921|#]]] 또한 리히텐슈타인 공가는 금융 자산들 뿐만 아니라 높은 값어치의 예술품들과 보물들도 소유하고 있는데, [[2차 대전]] 당시 리히텐슈타인의 경제가 흔들리자 [[프란츠 요제프 2세]]가 미술품들을 내다 팔기도 했다. 2018년에는 공가의 보물들이 한국에 전시되어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리히텐슈타인 왕가의 보물’ 특별전이 열리기도 했다. == 기타 == * 공가의 종교는 [[가톨릭]]이다. 리히텐슈타인 공국은 가톨릭 신자 비율이 약 70%에 달한다. [[분류:유럽의 공가]][[분류:오스트리아의 귀족 가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