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리투아니아의 역사)] [include(틀:제1차 세계 대전 참전국)] ||<-2><:>{{{#fdb913 '''{{{+2 리투아니아 왕국}}}'''[br]Lietuvos Karalystė [br]Königreich Litauen }}} || ||<-2><:> [[파일:리투아니아 국기.svg|width=50%]] || ||<-2><:> {{{#fdb913 '''국기'''}}} || ||<-2><:> {{{#fdb913 '''지도'''}}} || ||<-2> [[파일:Map_of_the_Kingdom_of_Lithuania_Wikipedia.png|width=90%]] || ||<-2><:> {{{#fdb913 '''1918년 2월 16일'''}}} {{{#fdb913 '''~'''}}} {{{#fdb913 '''1918년 11월 9일'''}}} || ||<:> {{{#fdb913 '''수도'''}}}||[[빌뉴스]] || ||<:> {{{#fdb913 '''정치체제'''}}}||[[군주제]] || ||<:> {{{#fdb913 '''언어'''}}}||[[리투아니아어]], [[폴란드어]], [[벨라루스어]] || || {{{#fdb913 '''역사'''}}} ||• 건국: 1918년 2월 16일[br] • 멸망: 1918년 11월 9일 || [목차] [clearfix] == 개요 == 1918년 [[독일 제국]]이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이후 세운 [[괴뢰국]]이다. == 건국과 독립 == 1915년,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독일 제국]]은 [[리투아니아]]를 포함한 [[러시아 제국]]의 서부 지역을 점령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독일 제국은 완충지대 역할을 할 국가들의 지정학적 전략을 구상했다. [[독일 제국]]은 [[빌뉴스]] 회의가 [[리투아니아]]가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독립하고 독일 제국과 "더 긴밀한 관계"를 맺기를 원한다는 것을 선언하기를 희망하면서 빌뉴스 회의의 조직을 허락했다. 그 후 1917년 9월, 리투아니아 의회는 독일 제국과 리투아니아의 독립을 협상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으며, 독일 제국은 확고하고 영구적인 동맹"을 원한다는 선언을 요구했다. 이 선언은 1917년 12월 11일 리투아니아 의회에서 채택되었다. 1918년 2월 16일 리투아니아 독립법이 제정되었다. 이 법은 [[독일 제국]]과의 동맹에 대한 언급을 생략하고 "전쟁 이전 모든 국가 관계의 종료"를 선언했다. 동년 3월 3일, 독일 제국과 [[러시아 SFSR]]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하여 [[발트 3국]]이 독일 제국의 지역임을 선언하고 러시아 SFSR는 영유권을 포기하였다. 이후 3월 23일, 독일은 공식적으로 리투아니아의 독립을 인정했지만, 리투아니아는 여전히 [[독일 제국군]]에게 점령당한 상태였으며, 평의회는 여전히 실질적인 권한이 없는 자문 위원회로 취급되었다. == 왕위 결정과 즉위 == [[리투아니아]]의 왕위는 [[독일 제국]]의 황제인 [[빌헬름 2세]]에게 처음 제안 되었다. 이 제안은 리투아니아와 독일 제국 사이에 연합을 만드는 시도였지만 좌절되었다. 그리고 다른 제안은 빌헬름의 막내 아들 요아힘 공의 즉위를 요구한 제안이었는데, 이미 왕가를 지배 중이었던 [[호엔촐레른 가문]]의 확장 계획은 [[작센]]의 [[베틴 가문]]과 [[바이에른]]의 [[비텔스바흐 가문]]과 같은 가톨릭 통치 가문들에 의해 반대되었다. 이후 베틴 가문은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3세]]의 둘째 아들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 공을 책봉시켰다. 이러한 과정은 [[리투아니아인]]들에게 독립에 대한 위협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이 위협은 5월 19일 관료들의 회의 이후 더욱 절실해졌는데, "단호하고 영구적인 동맹"을 규정하는 조약들이 거의 리투아니아인들에게 자치권을 넘겨주지 않았다. 1918년 6월 4일, [[리투아니아]] 의회는 비밀리에 [[입헌군주제]]를 수립하고 동년 3월부터 논의되었던 [[빌헬름 폰 우라흐]] 공작을 추대하기로 결정했다. 빌헬름 공작은 [[스위스]]에서 [[리투아니아인]]들과 함께 일했던 [[마티아스 에르츠베르거]]가 제안했다. 빌헬름 공작을 추대한 이유는 가톨릭 신자였고, 그의 할아버지의 결혼으로 [[뷔르템베르크 왕국]]의 왕위 계승권이 없었으며, [[호엔촐레른 가문]]과 밀접한 관계가 없었고, [[폴란드]]와 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완벽한 후보자로 보였다. 하지만 [[독일 제국군]]의 방해로 인해 [[프라이부르크]]에 있는 빌헬름 공작을 만나기 위한 리투아니아 대표단의 방문은 7월 1일까지 연기되었다. 몇 일 뒤인 7월 11일, 리투아니아 [[공의회]]는 공식적으로 왕정을 수립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8월 12일, 공의회는 빌헬름 공작을 리투아니아의 [[민다우가스 2세]] 국왕으로 추대하려 했다. == [[독일인]]의 반대와 갈등 == [[독일인]]들은 새로운 왕을 승인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리투아니아]]의 독립을 인정한 것은 [[독일 제국]]과의 동맹을 규정한 12월 11일 법령에 근거한 것이며, 따라서 리투아니아는 일방적으로 새로운 군주를 선출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리투아니아 [[공의회]]가 [[민다우가스 2세]]의 추대 직전에 리투아니아 국가평의회로 명칭을 변경했다고 항의했다. 공의회는 독일인들과의 협상에서 새로운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중단했지만 새로운 왕을 지지했다. 하지만 리투아니아 언론은 검열을 받았고 새 국왕에 대한 어떤 뉴스도 보도할 수 없었다. 공의회의 신문에서 새 국왕을 비난하는 기사를 싣는 것을 거부하자, 신문은 한 달 동안 [[폐간]] 처리 되었다. 그 여파로 독일 제국과 리투아니아 왕국의 관계는 1918년 10월까지 긴장 상태를 유지했다. ==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과 멸망 ==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 제국]]이 궁지에 몰리자, 10월 20일 [[독일 제국]]의 총리 [[막시밀리안 폰 바덴]]은 [[리투아니아]]의 독립을 거듭 인정하고, 독일 제국의 [[군정]]을 민간 정부로 전환하고, 리투아니아인들이 충분한 능력을 갖게 되면 그들이 통치 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이 소식을 접한 리투아니아 의회는 10월 28일 임시 헌법과 정부 구성을 논의하기 위해 소집되었다. 사전에 어떠한 초안도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헌법 초안을 작성하는데 며칠이 걸렸다. 그리고 변화된 정치적 상황은 [[민다우가스 2세]]를 선출하기로 한 의회의 결정은 철회 되었고, 리투아니아는 독일 제국으로부터 인정을 받기를 희망했지만 [[빌헬름 폰 우라흐]]를 왕으로 삼을 수 없었다. 이후 빌헬름 공작은 왕위를 포기할 의사가 있음을 시사했으며 이에 따라 11월 2일 의회는 빌헬름 공작에 대한 추대를 중단하고 향후 리투아니아 제헌의회에 최종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같은 날 의회는 최초의 임시 헌법을 채택했으며, 헌법은 제헌 국회가 최종 결정을 내릴 때까지 단순히 잠정적으로 정부를 구성했다. [[분류:독일 제국의 괴뢰국]][[분류:리투아니아의 역사]][[분류:유럽의 왕국]][[분류:1918년 멸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