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성명''' ||<(> 리옹넬 드 부르농빌[br]Lyonnel de Bournonville || ||<-2> '''생몰년도''' ||<(> [[1390년]]경 ~ [[1429년]] [[9월]] || ||<-2> '''출생지''' ||<(>[[프랑스 왕국]] [[파드칼레]] 주 불로네 || ||<-2> '''사망지''' ||<(> [[프랑스 왕국]] [[일드프랑스]] 생놈라브레테슈 || ||<-2> '''아버지''' ||<(> 보두앵 드 부르농빌 || ||<-2> '''형제''' ||<(> 기욤 드 부르농빌 || ||<-2> '''아내''' ||<(> 잔 드 빌리에 || ||<-2> '''자녀''' ||<(> 장([[사생아]]) || ||<-2> '''직위''' ||<(> 생놈라브레테슈 영주, 기사 || [목차] [clearfix] == 개요 == [[부르고뉴 공국]]의 군인. [[백년전쟁]] 시기 부르고뉴파의 일원으로서 활약했다. == 생애 == 1390년경 프랑스 왕국 파드칼레의 불로네 출신인 부르농빌 가문의 일원으로 출생했다. 아버지는 보두앵 드 부르농빌이며, 어머니는 알려지지 않았다. 형제로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1세(부르고뉴)|필리프 1세]]를 섬겼던 기욤 드 부르농빌이 있었다. 사촌으로 [[용맹공 장]]을 따라 아르마냑파와 대적했다가 1414년 5월 26일 수아송 공방전에서 체포된 뒤 처형된 [[앙게랑 드 부르농빌]]과 앙게랑의 형제로서 부르고뉴파의 일원으로서 활약하다가 [[아쟁쿠르 전투]]에서 전사한 알레움 드 부르농빌이 있었다. 이 세 사람은 할머니 마호트 드 파인즈를 통해 프랑스 무관장 [[로베르 드 파인즈]]의 조카였다. 1408년 사촌 앙게랑 드 부르농빌의 군대에 가담해 오테 전투에서 아르마냑파를 격파하는 데 일조했으며, 1409년 앙게랑과 함께 파리에 입성했다. 1415년 10월 25일 [[아쟁쿠르 전투]]에 다른 부르고뉴 영주들괗마게 참전했다가 다른 부르농빌 가족들이 대거 피살당할 때 겨우 목숨을 건져 달아났다. 1416년 동료였던 자코탱 드 그리니가 자신의 명예를 실추했다는 이유로 살해한 뒤 아르마냑파로 전향했지만, 1417년 용맹공 장과 화해하고 부르고뉴파에 귀환한 뒤 용맹공 장이 불로뉴 백국을 정복하는 데 일조했다. 1418년 [[장 빌리에 드 릴라당]]이 지휘하는 중대에 참여해 파리를 공략하는 데 일조했으며, 1419-1420년경 장 빌리에 드 릴라당의 여동생인 잔 드 빌리에와 결혼했다. 1419년 아르마냑파에게 사로잡혀 쿠시 성에 갇혔다가 부르고뉴인들이 이 성을 공략한 덕분에 자유의 몸이 되었다. 이후 장 드 빌리에의 명령에 따라 잉글랜드군과 전쟁을 벌인 뒤 기조르 성채 수비대장이 되었고, 그곳에서 군대를 조직한 뒤 세리폰테인에서 잉글랜드군을 격퇴했다. 그러나 제1대 팬호프 남작 존 콘월이 이끄는 잉그랜드군이 기조르를 포위하자, 그는 그들과 협상한 끝에 1419년 9월 11일 무장한 채 떠나는 걸 허용받는 대가로 기조르 성채를 넘겨줬다. 1420년 4월 장 빌리에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고, 생놈라브레테슈 영주가 되었다. 이후 트루아 조약이 성립되었고, 그는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의 휘하에 들어가서 [[샤를 7세|도팽 샤를]] 지지자들에 맞서 브리, 샹파뉴, 바로아, 피카르디 일대에서 전쟁을 벌였다. 1423년 장 빌리에와 함께 잉글랜드-부르고뉴 연합군에 합류했고, 1424년 콩피에뉴 공략을 이끌었다. 1426년 장 빌리에와 함께 에노의 자클린을 몰아붙인 끝에 [[저지대 국가]]를 정복했으며, 1429년까지 프랑스와 저지대 국가에서의 책무를 번갈아가며 수행했고, 슌호벤(Schoonhoven) 마을의 대장에 선임되었다. 1429년 [[랭커스터의 존|베드퍼드 공작 존]]에 의해 크레유 시의 대장에 선임되었지만, 샤를 7세의 군대에 의해 축출되었다. 1429년 9월 10일 베드퍼드 공작에 의해 프레시쉬르와즈의 영주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이 땅은 샤를 7세를 따르는 프랑스군이 통제하고 있어서 리옹넬이 이곳을 다스릴 수는 없었다. 이후 프랑스군이 탈취한 생놈라브레테슈를 되찾기 위해 공세를 개시했지만, 1429년 9월 22일에서 30일 사이에 공성전 도중에 부상을 입고 곧 사망했다. 그는 생전에 잔 드 빌리에와의 사이에서 자녀를 낳지 못했다. 다만 '노티네 드 부르농빌(Notinet de Bournonville)'로 알려진 사생아 장이 있었는데, 이 인물은 아버지와 함께 여러 전장에서 활동했고, 1460년 이후에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분류:프랑스의 귀족]][[분류:프랑스의 군인]][[분류:1390년 출생]][[분류:1429년 사망]][[분류:백년전쟁/인물]][[분류:백년전쟁/사망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