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사건사고)] {{{+1 李師科案 / Li Shike Incident }}} [[파일:nbZYdG4BMH2_cNUg30Co.jpg]] [목차] [clearfix] == 개요 == [[1982년]]에 발생한 [[대만]]의 [[범죄]] 사건. [[은행강도]]와 [[총기]] [[살인]]이 겹친 사건이다. == 배경 == [[파일:李師科2.jpg]] 리시커 체포 직후 [[파일:無天禪寺與李師科塑像.jpg]] 리시커 동상 리시커([[1927년]] [[3월 5일]] ~ [[1982년]] [[5월 26일]])는 [[산둥성]] 창러현 출신의 [[외성인]]으로 [[초졸]]이었다. [[중일전쟁]] 당시 [[국민혁명군]]에 참가하였다가 [[국공내전]] 때 [[홍콩]]과 [[하이난]] 섬을 거쳐서 [[1954년]] [[대만]]으로 들어왔다. 대만으로 들어온 후 자동차 수리업에 종사하다 [[1959년]] 병으로 은퇴하고 [[택시 기사]]가 되었으며 가족과 [[이웃]]들에 친절한 사람이라고 기억되었다. 문제는 리시커의 택시 기사 영업이 신통치 않아[* [[대만]]은 [[한국]]보다도 [[택시]]가 과포화된 상태다. 그래서 대만 [[택시 기사]]들의 생활고가 이미 [[1960년대]]부터 심각했다.] 리시커가 [[은행]]에 [[빚]]을 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리시커는 택시 기사로 열심히 일해도 은행 빚만 늘어나는 상황에 불만을 가지고 범죄를 계획했다. == 사건 == [[1979년]] 리시커는 신분을 철저히 감춘 채 [[실탄]] 1발이 들어있는 [[권총]]을 [[삼합회]]를 통해 입수하였다. 그리고 [[1980년]] [[1월]] [[타이베이시]]에 있는 [[대만]] 주재 [[교황청]] [[대사관]]에 쳐들어가 경비원을 살해하고 실탄 5발이 들어 있는 [[리볼버]]를 훔친 후 재빨리 사라졌다. [[대만]] 정부에서는 해당 사건의 범인을 찾으려고 했으나 2년 넘게 범인을 찾지 못했다. 리시커는 이 틈에 철저하게 자신을 위장하고 일상으로 복귀했다. [[1982년]] [[4월 14일]] 오후 3시 20분(한국시간 16:20) 리시커는 변장한 채로 [[대만토지은행]] 구팅지점[* [[대만토지은행]]은 [[대만]]의 대형 [[은행]] 중 한 곳이지만 구팅지점은 리시커 사건으로 인해 [[1984년]] 폐쇄되었다. 사건 이후 토지은행 구팅지점 자리에는 [[재개발]]로 다른 건물이 들어서 있다.]에 쳐들어가서 은행 부지점장을 총으로 살해하고 420만 [[신 대만 달러]]를 강탈했다. 리시커는 이때 '''"대만의 모든 돈은 국가에 속한다! 은행은 국민한테 빚을 지울 권리가 없다!"'''고 소리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는 [[대만 계엄령]]이 실시되던 시대였으며 치안을 대만 경찰과 육군 헌병대가 동시에 관리했다. 강도 신고를 받고 [[경정서|대만 경찰]]과 [[대만 육군]] 헌병대가 사건 발생 5분만에 현장에 도착했으나 이미 리시커는 도망친 후였다. 대신 경찰과 헌병대는 한 택시를 리시커의 택시로 특정하고 추적하기 시작하였다. == 왕잉셴 사건(王迎先事件) == 사건으로부터 23일 만인 [[1982년]] [[5월 6일]] [[택시 기사]] 왕잉셴(王迎先)이 리시커와 인상착의가 비슷하고 왕잉셴의 택시가 리시커의 택시와 같은 것으로 판정되어 체포되었다. 대만 경찰은 왕잉셴이 대만토지은행 강도사건의 범인이 아니냐며 추궁했고 4명의 경찰이 왕잉셴을 [[고문]]했다. '''문제는 왕잉셴이 진범이 아니었다는 것'''. 체포 하루만인 [[5월 7일]] 새벽 3시 왕잉셴은 경찰서를 탈출하여 [[슈랑교역|슈랑대교]]로 달려갔다. 왕잉셴은 슈랑대교에서 경찰들의 고문을 비난하면서 [[투신자살]]했다. == 리시커 체포 및 처형 == 리시커는 체포될 때까지 420만 대만 달러 중 실질적으로 20만 달러만 사용하였다. 5만 달러는 [[전기밥솥]]을 사는 데 사용했고 15만 달러는 [[텔레비전]]을 사는 데에 사용하였다. 나머지 400만 달러는 [[싼충구]]에 있던 친척의 계좌로 입금했는데 이 친척이 "리시커가 이렇게 돈이 많을 리가 없는데?" 하면서 [[5월 6일]] 밤에 경찰에 해당 돈이 의심된다며 '''대만군 헌병한테''' 제보한 것이 결정타가 되었다. [[1982년]] [[5월 7일]] 오후 6시 [[대만 육군]] 헌병대가 대만 경찰과의 협조로 진범인 리시커의 집에 들이닥쳐 리시커를 체포하였다. 리시커는 쉽게 범행을 인정했고 [[1980년]]의 교황청 대사관 [[테러]] 사건도 본인이 한 것이라고 인정했다. [[5월 24일]] [[대만 계엄령]]에 따른 군사재판에서 리시커는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이틀 후인 [[5월 26일]] [[총살형]]으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 후폭풍 == 이 사건으로 [[대만]]의 [[은행]]에서는 [[마스크]]나 [[헬멧]] 등 '''신분을 감출 수 있는 모든 것'''을 착용할 수 없게 되었으며 [[은행]] 지점에 들어갈 때 지나치게 큰 [[가방]]은 은행원이나 청원경찰이 의무적으로 내용물을 검사하도록 바뀌었다. 또 왕잉셴 사건에서 벌어진 [[고문]]을 막기 위해 [[대만]]의 [[형사소송법]] 제27조가 개정되었다. 대만 수사기관[* [[경정서|대만 경찰]], 대만 검찰국, [[대만군]] 헌병대]에서 [[피의자]]에 대해 고문할 경우 고문으로 얻어진 증거 및 증언, 자백 등은 [[법원]]에서 효력이 부인되며 피고인의 증언만 있으면 고문으로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때문에 대만에서는 리시커 사건 이후 고문이 없어졌을 뿐만 아니라 '''[[구속(형사절차)|구속]] 수사 자체가''' 매우 드물어졌다. 구속수사 한 것을 피고인이 법정에서 "난 그거 고문으로 느꼈다!"고만 말하면 고문으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때문에 [[살인]]사건의 진범 역시 재판 이전에는 쉽사리 구속시키지 않는다. [[분류:대만의 살인사건]][[분류:아시아의 강도살인 사건]][[분류:은행강도]][[분류:타이베이시의 사건사고]][[분류:장징궈 시대]][[분류:1982년 범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