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로마 제국 집정관]][[분류:기원전 1세기 집정관]] [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기원전 1세기)] |||| {{{+3 '''루키우스 타리우스 루푸스''' }}}[br]{{{-1 [[라틴어]]: : Lucius Tarius Rufus}}} || || '''생몰년도''' ||미상 ~ 미상 || || '''출생지''' ||[[로마 공화국]] 피케눔 또는 [[달마티아]] || || '''사망지''' ||[[로마 제국]] 로마 || || '''지위''' ||노부스 호모(Novus Homo: 신참자) || || '''국가''' ||[[로마 공화국]] → [[로마 제국]] || || '''가족'''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아들 || || '''직업''' ||[[로마 제국]] [[집정관]] || |||| '''로마 제국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6년 || || '''전임''' ||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기원전 16년 집정관)|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br][[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기원전 16년 집정관)|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 || '''동기''' ||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기원전 16년 집정관)|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 || '''후임''' ||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리보]][br][[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기원전 15년 집정관)|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 ||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제국]] [[집정관]]. == 행적 == 기원은 전해지지 않는다. 일부 학자들은 그가 말년에 피케눔에 토지를 대거 구입해 그곳에서 여생을 보낸 것을 근거로 피케눔 출신일 거리고 추정하며, 또다른 학자들은 [[옥타비아누스의 일리리아 원정]] 때 옥타비아누스에게 귀순한 달마티아의 리부르니아인일 거라고 추정한다. 그는 매우 미천한 출신이었지만 군사적으로 뛰어난 역량을 갖춰 옥타비아누스의 인정을 받고 함대 사령관으로 선임되었다. 기원전 31년 9월 [[악티움 해전]]이 벌어지기 직전에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부관인 [[가이우스 소시우스]]의 함선의 기습 공격을 받고 패주했지만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가 급파한 구원 함대의 도움을 받고 전력을 재정비한 뒤 소시우스를 격퇴했다. 기원전 17년 마케도니아 총독으로 선임되어 기원전 16년 상반기까지 도나우 강 하류 지대에 거주하던 [[사르마티아]]를 격파해 도나우강 너머로 몰아냈다. 기원전 16년 후반기에 로마로 귀환한 뒤 보결 집정관에 선임되어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기원전 16년 집정관)|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와 함께 임기를 수행했다. 그는 마케도니아에서 치른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과 아우구스투스의 후원 덕분에 큰 재산을 확보했고, 이를 와인 사업에 투자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피케눔에 정착한 그는 1억 [[세스테르티우스]]에 달하는 거금을 토지 구매에 사용했다. 그러나 훗날 그가 사망한 뒤 그의 상속인은 이 거대한 토지를 물려받기를 거부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아들은 아버지의 유산을 빨리 얻으려고 독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그는 가족 재판을 열고 아우구스투스를 이 재판에 초대했다. 아우구스투스는 그의 아들이 유죄임을 확인하고 참석자들에게 아버지를 죽이려 한 아들을 마실리아로 추방하는 데 투표하도록 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타리우스의 유산을 물려받지 않겠다고 선언헀고, 다른 참석자들에게도 이를 맹세하도록 했다. [[세네카]]의 저서 <관용에 대하여>에 따르면, 타리우스는 자신을 죽이려 한 아들을 용서하고 보조금을 계속 지급했다고 한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