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기원전 2세기 집정관]][[분류:로마 공화국 집정관]][[분류:로마 공화국 감찰관]][[분류:로마 출신 인물]] [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기원전 2세기)] [include(틀:역대 로마 감찰관)] ||||<#800080> {{{#ffffff {{{+3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루푸스''' }}}[br]{{{-1 [[라틴어]]: Lucius Cornelius Lentulus Lupus }}} }}} || ||<#800080> {{{#ffffff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800080> {{{#ffffff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800080> {{{#ffffff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800080> {{{#ffffff '''지위''' }}} ||[[파트리키]] || ||<#800080> {{{#ffffff '''국가''' }}} ||[[로마 공화정]] || ||<#800080> {{{#ffffff '''가족'''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카우디누스(기원전 237년 집정관)|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카우디누스]](조부)[br][[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기원전 201년 집정관)|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아버지)[br][[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기원전 146년 집정관)|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형제) || ||<#800080> {{{#ffffff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800080> {{{#ffffff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800080> {{{#ffffff '''임기''' }}} || 기원전 156년 || ||<#800080> {{{#ffffff '''전임''' }}} || [[섹스투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기원전 157년 집정관)|섹스투스 율리우스 카이사르]][br][[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오레스테스(기원전 157년 집정관)|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오레스테스]] || ||<#800080> {{{#ffffff '''동기''' }}} ||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피굴루스(기원전 162년 집정관)|가이우스 마르키우스 피굴루스]] || ||<#800080> {{{#ffffff '''후임''' }}}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코르쿨룸]][br][[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기원전 166년 집정관)|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공화국]] [[집정관]], [[감찰관]]. == 생애 == 고대 로마의 [[파트리키]] 가문인 [[코르넬리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조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카우디누스(기원전 237년 집정관)|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카우디누스]]는 기원전 237년 집정관을 역임했고, 아버지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기원전 201년 집정관)|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는 기원전 201년 집정관을 역임했다. 형제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기원전 146년 집정관)|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는 기원전 146년 집정관을 역임했다. 기원전 163년 수석 [[조영관]]을 맡아 메갈레시아 경기를 개최했는데, 이때 로마 극작가 푸블리우스 테렌티우스 아페르의 희극 <헤우톤 티모루메노스(Heauton Timorumenos)>를 공연했다. 기원전 161년 [[대 그라쿠스]], 세르비우스 글라우키아스와 함께 동방으로 파견되어 [[셀레우코스 제국]]의 왕자 [[데메트리오스 1세|데메트리오스]]가 로마에서 인질로 있다가 탈출한 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살펴보고 셀레우코스 제국과 다른 국가들간의 분쟁을 해결하는 임무를 맡았다. [[카파도키아 왕국]]의 국왕 [[아리아라테스 5세]]는 사절단을 잘 대접하고 데메트리오스 1세가 로마의 허락을 받지 않고 무단으로 귀국한 뒤 정변을 일으켜 사촌인 [[안티오코스 5세]]를 축출하고 왕위에 오른 것을 비판하면서, 원로원이 나중에 셀레우코스 제국에 대한 어떤 결정을 내리든 도움을 주겠다고 제안해 로마의 호감을 얻어냈다. 기원전 160년 [[법무관]]을 맡았을 때 티볼리에서 온 사절단이 원로원에서 자기들을 겨냥한 고발로부터 변호할 수 있는 발언권을 부여하도록 했으며, 나중에 그들에게 원로원의 답변을 전달했다. 기원전 156년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피굴루스(기원전 162년 집정관)|가이우스 마르키우스 피굴루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이후 알려지지 않은 속주를 다스렸으나 로마로 귀환한 직후 속주민 강탈 혐의로 법정에 회부되었다. 그러나 재판 결과는 알려지지 않았다. 한편, 그는 [[고대 카르타고]]를 멸망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대 카토]]의 주장에 강하게 반대했다고 전해진다. 기원전 147년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켄소리누스(기원전 149년 집정관)|루키우스 마르키우스 켄소리누스]]와 함께 [[감찰관]]에 선임되었지만 별다른 행적이 전해지지 않는다. 기원전 140년 [[시빌라 예언서]]를 관리하는 '데켐브리 사크리스 파키운디스(decemviri sacris faciundis: 10명의 신성한 책 관리자)'의 일원이 되었다. 기원전 130년 프린켑스 세나투스를 맡았다. 이외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그를 탁월한 웅변을 갖춘 인물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그와 동시대 사람이었던 시인 가이우스 루킬리우스는 여러 풍자에서 그를 위선적인 인간으로 묘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