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기원전 1세기 집정관]][[분류:로마 공화국 집정관]][[분류:로마 공화국 감찰관]][[분류:기원전 87년 사망]][[분류:로마 출신 인물]] [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기원전 1세기)] [include(틀:역대 로마 감찰관)] ||||<#800080> {{{#ffffff {{{+3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br]{{{-1 [[라틴어]]: Lucius Julius Caesar }}}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기원전 90년 집정관).jpg|width=100%]]}}} || ||<#800080> {{{#ffffff '''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87년 || ||<#800080> {{{#ffffff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800080> {{{#ffffff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800080> {{{#ffffff '''지위''' }}} ||[[파트리키(계급)|파트리키]] || ||<#800080> {{{#ffffff '''국가''' }}} ||[[로마 공화국]] || ||<#800080> {{{#ffffff '''가족''' }}} ||[[섹스투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기원전 157년 집정관)|섹스투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조부)[br]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아버지)[br]포필리아(어머니)[br][[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스트라보 보피스쿠스]](형제)[br][[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기원전 102년 집정관)|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이부 형제)[br]풀비아(부인)[br][[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기원전 64년 집정관)|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아들)[br][[율리아 안토니아]](딸) || ||<#800080> {{{#ffffff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800080> {{{#ffffff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800080> {{{#ffffff '''임기''' }}} || 기원전 90년 || ||<#800080> {{{#ffffff '''전임''' }}} ||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기원전 91년 집정관)|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br][[섹스투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기원전 91년 집정관)|섹스투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 ||<#800080> {{{#ffffff '''동기''' }}} || [[푸블리우스 루틸리우스 루푸스(기원전 90년 집정관)|푸블리우스 루틸리우스 루푸스]] || ||<#800080> {{{#ffffff '''후임''' }}} ||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스트라보]][br][[루키우스 포르키우스 카토]] ||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공화국]]의 [[집정관]]. [[동맹시 전쟁]] 초기 이탈리아인들의 반란을 진압하는 임무를 수행했으며, 반란에 가담하지 않았거나 귀순한 이탈리아인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기원전 87년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로마에 입성한 뒤 형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스트라보 보피스쿠스]]와 함께 피살당했다. == 생애 == [[율리우스]] 가문은 [[고대 로마]]의 모체인 알바 롱가에서 시작된 [[파트리키(계급)|파트리키]] 씨족이다. 이 가문의 일원들은 자신들을 [[비너스]]의 후예로 자처했으며, [[로마 공화국]] 초기 집정관 등 고위 행정직을 잇따라 역임했다. 그러나 기원전 3세기부터 다른 가문들과의 경쟁에서 밀렸고, 나중에는 역사에 거의 언급되지 않을 정도로 쇠락했다. 그의 삼촌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기원전 123년에 법무관을 역임한 것이 율리우스 가문이 기원전 2세기에 거둔 유일한 성과였다. 조부 [[섹스투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기원전 157년 집정관)|섹스투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기원전 157년 집정관을 역임했고, 아버지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한때 동전을 주조하는 임무를 수행했다는 것만 알려졌을 뿐 별다른 행적이 전해지지 않는다. 루키우스는 포필리아라는 여인과 결혼해 두 아들 루키우스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스트라보 보피스쿠스]]를 낳았다. 포필리아는 그 전에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와 결혼하여 기원전 102년 집정관을 역임하면서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함께 [[킴브리 전쟁]]을 승리로 이끈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기원전 102년 집정관)|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를 낳았다. 그 유명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아버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기원전 91년 아시아 총독)|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섹스투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기원전 91년 집정관)|섹스투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그의 육촌으로, 율리우스 씨족의 다른 지파에 속했다. 그가 집정관이 되기 전의 생애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다만 율리우스 가문과 연을 맺은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지원해 준 덕분에 정계에 본격적으로 뛰어들 수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기원전 100년 마리우스와 정치적 동맹을 맺은 [[호민관]]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의 추종자들과 [[원로원]] 지지자들과의 투쟁이 벌어졌을 때, 그는 한 때 사투르니누스 편에 섰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마리우스가 [[원로원 최종결의]]를 선고받은 사투르니누스와의 동맹을 끊고 사투르니누스 토벌을 단행하자, 그는 이에 따라 사투르니누스를 공격했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공공 상점에서 무기를 챙겨서 사투르니누스 일당을 공격한 이들 중에 "모든 율리우스"도 있었다고 밝혔다. 그 후 마리우스의 영향력이 약해지자, 그와 형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스트라보 보피스쿠스는 마리우스와의 동맹을 끊었다. 반면 사촌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섹스투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마리우스와의 동맹을 이어갔다. 그는 [[조영관]]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고 전해지나 정확한 시기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후 기원전 95년 또는 기원전 93년에 법무관에 선출된 뒤 마케도니아 지방의 총독을 역임했다. 사모트라케에서 발견된 두 개의 비문에 마케도니아 총독을 맡은 그의 이름이 새겨졌다. 또한 재무관 아울루스 샘프로니우스 아셀리오는 "Cae(sar) pr(aetor) Makedonia"라는 문구가 새겨진 테트라드라크마를 주조했다. 기원전 90년, 그는 [[푸블리우스 루틸리우스 루푸스(기원전 90년 집정관)|푸블리우스 루틸리우스 루푸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당시 로마 공화국은 모든 이탈리아인이 로마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동맹시 전쟁]]이라는 초유의 사태에 직면했다. 그는 [[삼니움]]인에 대항하는 남쪽 전선을 맡았고, 루푸스는 북쪽 전선을 맡았다. 그는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티투스 디디우스]],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기원전 97년 집정관)|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를 [[레가투스(로마)|레가투스]](Legatus, 군단장)으로 삼아 반란 진압에 임했으나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이세르니아에서 펠리그니인들의 지도자 베티우스 스카토에게 패배해 2,000명을 상실했고, 부관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도 루카니아에서 패배했다. 그는 전열을 재정비한 뒤 캄파니아 일대를 거의 장악하고 있던 삼니움 지도자 가이우스 파피우스 무틸루스를 상대로 공세를 펼쳐 놀라, 살레르노, 스타비아에, 미네르비우스 및 여러 도시를 공략하고 아케라를 포위했다. 그러나 무틸루스가 [[유구르타]]의 아들 옥시타스에게 보라색 의복을 입힌 뒤 로마군에 복무하는 누미디아 기병대 앞에 내세우며 회유해 다수를 자기 편으로 끌여들이자, 그는 더 이상의 전력 손실을 피하기 위해 누미디아 기병대를 다른 곳으로 보내야 했다. 이후 삼니움족이 진영을 공격해오자 이를 격퇴하여 6,000명의 적병을 사살해 병사들로부터 [[임페라토르]]로 선포되었다. 그 결과 이탈리아인들의 캄파니아 공략은 중단되었다. 하지만 그는 아케라 공략에 실패했고, 아풀리아 전체는 이탈리아인들의 수중에 넘어갔다. 한편, 동료 집정관 푸블리우스 루틸리우스 루푸스는 전투를 치르던 중 사망했다. 그가 삼니움인들과 전쟁을 치르느라 로마로 돌아올 수 없었기 때문에, 보결 집정관은 따로 선출되지 않았다. 나중에 '율리우스'가 이끄는 45,000명의 로마군이 테아나로 진군했다가 삼니움인 마리우스 에그나티우스의 기습 공격을 받아 대부분 전사하고 생존자들은 무기를 모두 내주고 풀려나는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반란 진압에 뛰어든 율리우스는 그와 섹스투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였는데, 둘 중 누가 이 패배를 초래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기원전 90년 연말, 그는 다음 집정관 선거를 집행하기 위해 로마로 돌아왔다. 그는 원로원의 지시에 따라 [[유피테르]]의 신전을 복원했고, 로마에 여전히 충성하던 에트루리아인과 움브리아인들이 반란에 가담해야 하는지를 고심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공화국에 충성하는 모든 동맹시와 라틴인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자"는 법안 를 제시했다. 지난날 [[소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가 비슷한 법안을 제시했을 때 격렬하게 반대했던 인사들은 이번만큼은 별다른 반대를 하지 못했고, 법안은 10월 또는 11월 상반기에 통과되었다. 기원전 89년, 그는 지난해에 레가투스로 부렸던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와 함께 [[감찰관]]에 선출되었다. 그들은 희생제를 치렀지만 이탈리아 전역이 여전히 전쟁 중이라는 이유로 인구 조사를 실시하지 않았다. 또한 2달 안에 무기를 내려놓고 귀순한 모든 이탈리아인을 로마 시민으로 인정한다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향과 외국 와인 수입에 대한 제한을 도입했다. 이는 전쟁으로 인한 경제 위기가 발생하자 생필품 수입을 촉진하기 위해 도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두 감찰관은 [[트로이]] 시에 속주세를 더 이상 매기지 않기로 결의했다. 기원전 88년 동맹시 전쟁이 종결되었지만,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정치 대립이 격렬해지면서 정국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그는 술라 편을 들었고, 술라에게 축출된 마리우스를 국가의 적으로 낙인찍는 데 동의했다. 그러나 기원전 87년 술라가 [[미트리다테스 6세]]를 상대하러 동방에 출진한 뒤 마리우스가 돌아와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 등 반 술라 세력을 규합해 로마로 진격했다. 현직 집정관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기원전 87년 집정관)|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 등 술라파가 이에 맞서 항전했으나 끝내 패배를 면치 못했고, 마리우스는 그 해 12월 로마에 입성한 뒤 자신을 국가의 적으로 선포한 원로원 의원들에 대한 대숙청을 단행했다. 이때 그 역시 친형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스트라보 보피스쿠스와 이부형제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와 함께 살해되었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카툴루스는 재판에 회부되자 자신의 운명이 결정되었음을 눈치채고 자살했고 카이사르 형제는 법적 절차를 거치기도 전에 길거리에서 피살당했다고 한다. 그와 가이우스 형제의 수급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오라토르]]의 수급과 함께 [[포로 로마노]] 연단에 전시되었다. == 후손 == 그는 기원전 125년 집정관 [[마르쿠스 풀비우스 플라쿠스(기원전 125년 집정관)|마르쿠스 풀비우스 플라쿠스]]의 딸 풀비아와 결혼하여 아들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기원전 64년 집정관)|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딸 [[율리아 안토니아]]를 낳았다. 아들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기원전 64년 집정관을 역임했다. 딸 율리아는 기원전 74년 법무관을 역임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크레티쿠스]]와 결혼해 세 아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가이우스 안토니우스]], [[루키우스 안토니우스]]를 낳았다. 기원전 71년 남편 안토니우스가 해적 토벌에 착수했다가 크레타 섬에서 사망하자, 그 해 집정관인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수라]]와 재혼했다. 그러나 렌툴루스는 기원전 63년 12월 5일 [[루키우스 세르기우스 카틸리나]]의 국가 전복 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집정관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에게 처형되었다. 그 후 율리아는 더 이상 결혼하지 않고 자녀들을 기르는 데 힘을 기울였다. 기원전 64년 집정관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기원전 49년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하자 카이사르 편에 섰다. 반면 그의 아들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편에 서서 카이사르에게 끈질기게 대적하다가 기원전 46년 [[탑수스 전투]]에서 카이사르가 승리하자 항복했지만 그 해 말 돌연 카이사르를 따르던 병사들에게 살해당했다. 이에 대해서는 카이사르가 지시했다는 설, 그의 악행을 전해들은 장병들이 분노해 독단적으로 살해했다는 설이 제시되지만 어느 쪽이 맞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이 벌어지자,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카이사르 해방자'를 자처한 카이사르 암살자들과 조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사이를 오가며 양자간의 화해를 이루고자 노력했다. 또한 기원전 43년 3월 초에는 안토니우스와 [[데키무스 브루투스]] 간의 휴전을 주선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안토니우스가 [[무티나 내전]]에서 패배하고 갈리아로 도주한 뒤에는 안토니우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언한 게 옳다고 밝혔으나, 이로 인해 제2차 [[삼두정치]]가 결성된 후 척결 대상으로 낙인찍히자 은신했다. 안토니우스는 나중에 자신의 어머니이자 루키우스의 여동생인 율리아의 간곡한 설득을 받아들여 그를 용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