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기원전 2세기 집정관]][[분류:로마 공화국 집정관]][[분류:로마 출신 인물]] [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기원전 2세기)] ||||<#800080> {{{#ffffff {{{+3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br]{{{-1 [[라틴어]]: Lucius Aurelius Cotta }}} }}} || ||<#800080> {{{#ffffff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800080> {{{#ffffff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800080> {{{#ffffff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800080> {{{#ffffff '''지위''' }}} ||[[노빌레스]] || ||<#800080> {{{#ffffff '''국가''' }}} ||[[로마 공화정]] || ||<#800080> {{{#ffffff '''가족''' }}}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조부)[br]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코타(아버지)[br][[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기원전 119년 집정관)|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아들)[br]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코타(아들) || ||<#800080> {{{#ffffff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800080> {{{#ffffff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800080> {{{#ffffff '''임기''' }}} || 기원전 144년 || ||<#800080> {{{#ffffff '''전임''' }}} ||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아이밀리아누스[br]루키우스 호스틸리우스 만키누스 || ||<#800080> {{{#ffffff '''동기''' }}} ||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기원전 144년 집정관)|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코타]] || ||<#800080> {{{#ffffff '''후임''' }}} ||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기원전 143년 집정관)|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br][[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마케도니쿠스]] ||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생애 == 고대 로마의 저명한 [[노빌레스]] 가문인 아우렐리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조부는 가이우스, 아버지는 루키우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한다. 일부 학자들은 조부 가이우스는 [[제2차 포에니 전쟁]] 시기인 기원전 216년에 [[레가투스(로마)|레가투스]]를 맡았으며, 아버지 루키우스는 기원전 196년 [[재무관]]을 역임했다고 추정한다. 이것이 사실일 경우, 기원전 200년 집정관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기원전 200년 집정관)|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는 그의 삼촌일 것이며, 기원전 252년 집정관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기원전 252년 집정관)|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는 그의 증조부일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기원전 154년 [[호민관]]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가 기원전 144년 집정관과 동일인물이라고 주장한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에 따르면, 기원전 154년 호민관 코타는 채권자들에게 빚을 지불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호민관의 권한을 사용하려 했지만, 다른 호민관들이 빚을 지불하지 않는다면 채권자의 편에 서겠다고 위협하자 결국 굴복했다고 한다. 또다른 학자들은 기원전 181년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 휘하 [[트리부누스 밀리툼]]을 맡았던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가 기원전 144년 집정관과 동일인물이라고 추정한다. 이 코타는 리구리아인과의 전투에서 제3 군단을 이끌어 승리에 일조했고, 파울루스는 그를 로마로 보내 개선식을 거행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현대 학자들은 기원전 180년 최고 행정관 간의 취임 간격을 규정한 빌리우스 법에 따라 기원전 147년 이전에 [[법무관]]을 역임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기원전 144년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기원전 144년 집정관)|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코타]]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된 그는 [[루시타니아 전쟁]]에 참전해 군공을 세우고 싶어했고, 이를 이루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그러나 당시 원로원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가 반대했다. >"나는 두 사람 모두 보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오. 첫번째 집정관(코타)은 (경력이) 아무것도 없고, 두번째 집정관(갈바)은 지나치게 많기 때문이오." 원로원은 아이밀리아누스의 주장에 따라 당시 먼 히스파니아 총독이며 아이밀리아누스의 형제인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아이밀리아누스에게 지휘권을 일임하기로 했다. 그 후 그는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마케도니쿠스]]를 후원해 기원전 143년 집정관이 되는데 일조했다. 나중에 모종의 속주 총독으로 부임했다가 총독 임기 만료 후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에게 속주민을 착취한 혐의로 고발당했지만, 메텔루스가 변호해준 덕분에 무죄를 선고받았다.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코타와 메텔루스가 판사들에게 막대한 뇌물을 건넨 덕분에 범죄가 명백했는데도 무죄를 선고받았다고 주장했고, 나중에 호민관을 맡았을 때 이 일을 사법 개혁을 추진하는 이유로 지목했다. 코타의 이후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아들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기원전 119년 집정관)|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는 기원전 119년 집정관을 역임했고, 또다른 아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코타는 별다른 행적이 전해지지 않으나 각각 기원전 75년, 기원전 74년, 기원전 65년 집정관을 역임한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가이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코타(기원전 74년 집정관)|마르쿠스]],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기원전 65년 집정관)|루키우스]]를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