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기원전 1세기)] ||||<#800080> {{{#ffffff {{{+3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br]{{{-1 [[라틴어]]: Lucius Scribonius Libo }}}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jpg|width=300]]}}} || ||<#800080> {{{#ffffff '''생몰년도''' }}} ||기원전 90년 ~ 미상 || ||<#800080> {{{#ffffff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800080> {{{#ffffff '''사망지''' }}} ||미상 || ||<#800080> {{{#ffffff '''지위''' }}} ||평민 귀족([[노빌레스]]) || ||<#800080> {{{#ffffff '''국가''' }}} ||[[로마 공화국]] || ||<#800080> {{{#ffffff '''가족''' }}}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아버지)[br]센티아(어머니)[br] 코르넬리아 술라(아내)[br][[스크리보니아]](딸)[br]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아들)[br]마르쿠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드루수스(아들) || ||<#800080> {{{#ffffff '''참전''' }}} ||[[카이사르의 내전]] || ||<#800080> {{{#ffffff '''직업'''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800080> {{{#ffffff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800080> {{{#ffffff '''임기''' }}} || 기원전 34년 || ||<#800080> {{{#ffffff '''전임''' }}} || [[루키우스 코르니피키우스]]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기원전 35년 집정관)|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와 동명이인이다.][br][[섹스투스 폼페이우스(기원전 35년 집정관)|섹스투스 폼페이우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동명이인이다.] → [[티투스 페두카이우스]] || ||<#800080> {{{#ffffff '''동기''' }}} ||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 [[루키우스 셈프로니우스 아트라티누스(기원전 34년 집정관)|루키우스 셈프로니우스 아트라티누스]] || ||<#800080> {{{#ffffff '''후임''' }}} || [[파울루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br][[가이우스 멤미우스(기원전 34년 집정관)|가이우스 멤미우스]] → [[마르쿠스 헤렌니우스 피켄스(기원전 34년 집정관)|마르쿠스 헤렌니우스 피켄스]] ||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공화국]]의 군인, 정치인. [[카이사르의 내전]] 시기 [[옵티마테스]] 파 장성으로서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상대로 해전에서 활약했다. 이후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부하가 되어 해전에서 계속 활약했으나, 섹스투스가 몰락하자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게 귀순했다. == 생애 == 기원전 3세기에 다른 이탈리아 도시에서 로마로 이주한 평민 씨족인 스크리보니우스 일족의 일원이다. 동명의 아버지는 기원전 90년 시칠리아에서 [[재무관]]으로 활동했다. 어머니 켄티아는 기원전 19년 집정관을 역임한 가이우스 센티우스 사투르니누스의 가까운 친척이었다. 기원전 90년에 출생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기원전 71년 또는 54년에 화폐 주조 책임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고대 기록에는 시칠리아에서 재무관을 역임한 리보와 로마에서 열린 대회를 주최한 [[조영관]] 리보가 언급되는데, 두 사례 모두 그를 가리키는 것일 가능성이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 그는 [[독재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유일한 아들인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와 폼페이우스의 딸인 폼페이아 마그나의 딸인 코르넬리아 술라와 결혼했다. [[폼페이우스]]의 친구이자 정치적 동맹자였으며, 딸[*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을 폼페이우스의 차남인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결혼시키기도 했다. 기원전 56년 [[프톨레마이오스 12세]]를 파라오에 복귀시키기 위해 폼페이우스를 이집트로 보내자는 푸블리우스 푸블리우스 플라우티우스 깁시우스의 제한을 지지했고, 폼페이우스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1년 후 그가 포미아 거주민인 헬비우스 만사의 고발을 물리치는 데 도움을 줬다. 고발의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가 거액의 부채를 진 것과 관련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49년 1월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했을 때, 그는 에트루리아를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지만 주민과 병사들이 전부 카이사르를 지지하는 바람에 카이사르의 부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상대로 제대로 맞서지 못하고 쫓겨났다. 이후 캄파니아에서 폼페이우스를 위해 모집된 신병들을 이끌어 브룬디시움으로 향했다. 브룬디시움에서 친구이자 카이사르파 인사인 [[가이우스 카니니우스 레빌루스(기원전 45년 집정관)|가이우스 카니니우스 레빌루스]]와 접촉해 평화를 협의하고자 하니 중재해달라는 요청을 받아들여 폼페이우스에게 전달했지만, 폼페이우스가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무산되었다. 이후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 휘하에 들어가 카이사르군이 배를 타고 발칸 반도로 넘어가는 걸 막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임무를 착실히 수행했지만, 카이사르군이 항구 도시를 모조리 장악하면서 함대 보급품이 다 떨어져가자 오리쿰에서 카이사르에게 휴전 협상을 제의했다. 카이사르가 휴전에 응할 테니 그쪽은 해양 봉쇄를 풀고 자신들은 항구를 풀어주겠다고 제안했지만, 그는 별다른 대꾸 없이 휴전부터 하자고 답했다. 그러자 카이사르는 그들이 함대에 재보급하려고 시간을 끌고 있다고 여기고 협상을 중단했다. 기원전 48년 초 비불루스가 해상에서 사망하자, 그는 50척의 갤리선으로 구성된 함대를 이끌었다. 그는 오리쿰을 계속 봉쇄하다가, 이탈리아의 항구 도시 브룬디시움을 봉쇄하면 카이사르와 지원군을 완벽하게 차단하고 다른 함대를 다른 곳으로 배치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브룬디시움으로 쳐들어가서 여러 척의 수송선을 불태우고 항구 입구에 위치한 섬에 군대를 상륙시켰으며,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한 개 분대를 격파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절묘한 계략으로 봉쇄를 풀었다. 몇몇 선박을 보내서 적 함대가 그쪽에 관심을 집중시켜 추격하도록 한 뒤, 매복하고 있던 다른 함대를 출격해 그들을 덮친 것이다. 그는 겨우 후퇴할 수 있었지만, 섬에 상륙했던 병력은 모조리 사로잡혔다. 그렇게 그를 격파한 안토니우스는 무사히 아드리아 해를 건너 일리리아에 도착했다. 폼페이우스가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패한 뒤 이집트로 망명했다가 피살된 후, 그는 카이사르와 화해하고 이탈리아로 돌아가 몇년간 조용히 지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키케로]], [[티투스 폼포니우스 아티쿠스]],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와 교류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가 암살당하자, 히스파니아에서 게릴라 활동을 전개하고 있던 사위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연락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기원전 43년 키케로가 처단당하고 제2차 [[삼두정치]]파가 그를 숙청 대상에 올리자, 그는 이탈리아를 탈출한 뒤 시칠리아를 장악한 섹스투스와 합류했다. 기원전 40년 [[옥타비아누스]]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동생 [[루키우스 안토니우스]] 및 안토니우스의 아내 [[풀비아]] 간의 [[페루시아 내전]]이 벌어지고 있을 때, 그는 안토니우스와 폼페이우스 사이의 동맹을 맺을 목적으로 안토니우스의 어머니 율리아와 함께 그리스로 가서 안토니우스를 설득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어머니의 설득에도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손을 잡길 거부했다. 이에 옥타비아누스는 그에게 결혼 동맹을 제의했고, 그는 이를 받아들이고 코르넬리아 술라[*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딸인 폼페이아 마그나와 [[독재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유일한 아들인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딸이다.]와의 사이에서 낳은 [[스크리보니아]]와 옥타비아누스를 결혼시켰다. 스크리보니아는 옥타비아누스의 유일한 혈육인 [[대 율리아]]를 낳았다. 기원전 39년,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사이의 평화 협상이 이어진 끝에 미세눔 조약이 체결되었다. 섹스투스의 추종자들과 공화파들은 시민권을 되찾았으며, 섹스투스가 이미 점령하고 있던 사르데냐와 코르시카, 시칠리아에 더해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추가로 얻게 되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내주는 걸 차일피일 미루는 바람에, 실제로 얻지는 못했다. 한편 그는 평화 협상을 중재한 대가로 차기 집정관을 약속받았다.그리고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딸이자 그의 손녀인 폼페이아가 옥타비아누스의 조카인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아우구스투스의 조카)|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와 약혼했다. 그러나 폼페이아와 마르켈루스의 결혼은 이뤄지지 않았다. 곧 옥타비아누스와 폼페이우스 사시에 새로운 전쟁이 벌어졌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는 초기엔 옥타비아누스 해군을 상대로 잇따라 대승을 거뒀지만, 옥타비아누스의 심복인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가 함대를 이끌고 반격을 가하여 승리를 거둔 데다 일전에 섹스투스가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에게 "레피두스를 배제하고 나를 삼두의 일원에 끼워넣어라"라고 제안한 것에 원한을 품고 있던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시칠리아에 상륙한 뒤 섹스투스의 육군을 상대로 승리하면서 전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섹스투스는 아시아로 도피했고, 그는 이를 따라갔다. 그러나 그는 곧 섹스투스에겐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보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편으로 넘어갔다. 기원전 34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출되었으며, 안토니우스가 1월 1일 하루만 집정관을 맡고 물러난 뒤 루키우스 셈프로니우스 아트라티누스와 함께 집정관을 맡았다. 그러나 7월 1일 아트라티누스와 함께 집정관에서 물러났고, [[파울루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가이우스 멤미우스(기원전 34년 집정관)|가이우스 멤미우스]]가 보결 집정관에 부임했다. 나중에 멤미우스 역시 9월이나 11월에 물러났고, [[마르쿠스 헤렌니우스 피켄스(기원전 34년 집정관)|마르쿠스 헤렌니우스 피켄스]]가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집정관에서 물러난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그는 아우구스투스와 결혼한 스크리보니아 외에도 두 아들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마르쿠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드루수스를 낳았다. 맏아들 루키우스는 서기 16년 집정관을 맡았다. 그러나 두 아들은 서기 16년경 [[티베리우스]] 황제에 대한 음모를 꾸몄다는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마르쿠스는 병마로 고생하고 있었기에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청했지만, 티베리우스는 가차없이 재판에 출두하라고 명령했다. 결국 마르쿠스는 16년 9월 13일에 배를 단검으로 두 번 찔러 자살했다. 형 루키우스 역시 유죄 판결을 받고 처형되었으며, 형제의 지지자들은 처형되었다. 티베리우스는 마르쿠스가 자살한 날을 공휴일로 지정하고, 앞으로 스크리보니우스 가문의 구성원들이 '드루수스'라는 이름을 쓰는 걸 금지했다. [[분류:기원전 1세기 집정관]][[분류:기원전 90년 출생]][[분류:로마 출신 인물]][[분류:로마 공화국 집정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