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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루치오 바티스티}}}[br]Lucio Battisti''' || ||<-2>{{{#!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battisti-656x463-U2012863883356QH-121x95@Gazzetta-Print-Nazionale-kycH-U32201909145900ByG-656x492@Corriere-Web-Sezioni.jpg|width=100%]]}}}|| ||<|2> '''출생''' ||[[1943년]] [[3월 5일]]|| ||[[라치오]] [[리에티]] [[포조부스토네]]|| ||<|2> '''사망''' ||[[1998년]] [[9월 9일]] (향년 55세)|| ||[[롬바르디아]] [[밀라노]]|| || '''국적''' ||[include(틀:국기, 국명=이탈리아)]|| || '''장르''' ||[[아트 팝]], [[프로크레시브 팝]], [[팝 록]], [[프로그레시브 록]], [[신스 팝]]|| [목차] [clearfix] == 개요 == [[이탈리아]]의 싱어송라이터. 1960년대 부터 1990년대까지 활동했던 뮤지션이다. 이탈리아 팝 음악계에서 당시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작품성과 대중성 모두 사로잡으며 당시 큰 인기를 누렸음은 물론, 현재까지도 많은 이탈리아 국민들에게 사랑받고 있으며, 많은 뮤지션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뮤지션이다. == 생애 == [[라치오]] 북부 출신인 바티스티는 커리어 초기 부터 이탈리아 내 [[나폴리]], [[로마]], [[밀라노]] 등 주요 도시는 물론, [[영국]], [[독일]], [[프랑스]] 등 다양한 유럽 국가들을 전전하면서 커리어를 쌓았다고 한다. 많은 국가들과 문화들은 바티스티의 음악 스타일을 더욱 다양하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모골(Mogol)[* 본명은 줄리오 라페티(Giulio Rapetti)]이라는 작사가에게 발굴되어 작업을 하기 시작한다. 이후 여러 대회에 참가하며 이름을 점차 알린 바티스티는 1969년 첫 정규 앨범 ''Lucio Battisti''를 발매한다. 이 앨범이 큰 성공을 거두면서 바티스티는 곧바로 이탈리아의 최고 뮤지션 중 한명으로 우뚝 섰고, 이후 1970년대 주기적으로 앨범을 발매하며 ''Il mio canto libero (1972)'', ''Il nostro caro angelo (1973)'' 등이 큰 성공을 거두면서 이탈리아 내는 물론, [[빌보드]]에서도 1972년 바티스티를 "올해의 이탈리아인"으로 선정하는 등 세계적인 명성 역시 쌓아나갔다. 오늘날 사람들에게 바티스티의 앨범들 중 현재 가장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을 뽑으라고 하면 바로 ''Anima latina (1974)''라고 할 수 있을텐데, 아이러니 하게도 당시 70년대 바티스티의 앨범들 중 대중적으로는 "비교적"[* 70년대 당시 바티스티의 인기는 끝을 달리고 있었다. 그래서 바티스티의 작품들 중 비교적 성공을 못했다 해도 이탈리아 1975년 앨범 판매 순위 8위에 기록되어 있다.] 성공하지 못했던 작품들 중 하나이다. 이 작품은 바티스티가 조금 더 [[프로그레시브 록]] 적으로 작품을 접근하며 이전 작품들 보다 더욱 실험적이고, 곡 전개 면에 있어서 정말 유연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명반으로 평가받는다. 이 작품은 현재는 이탈리아 역사상 가장 최고의 앨범 중 하나로 손꼽히며, 현재까지도 많은 이탈리아 팝/록 뮤지션들에게 교본 급으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바티스티는 이전에도 내성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공연을 자주 하는 뮤지션은 아니었지만, 1980년 이후에는 더 이상 공연과 인터뷰를 통해 모습을 나타내지 않을 것이며, 오직 음악으로써만 소통할 것임을 선언하며 더욱 자신의 음악 스타일에 집중하게 된다. 그는 긴 기간 이어졌던 모골과의 협업을 끝내고, 더욱 자기에 초점을 맞춘 실험적인 음악 스타일에 집중했다.[* 모골은 이 이후 수 년 동안 바티스티의 음악을 듣지 않았다고 한다. ] 바티스티 후기의 음악들은 점점 [[신스 팝]]에 가까워지더니 극 후반에는 거의 [[전자 음악]]에 가까운 앨범들을 발매했으며, 이 시기의 음악 스타일에는 많은 사람들의 호불호가 갈리기도 하나 역시나 많은 매니아층 사이에서 사랑받는다. 1994년 앨범 Hegel을 이후로 바티스티의 새로운 음악 작품 소식은 끝이 났으며, 오랜 기간 동안 소식이 없다가 1998년 [[밀라노]]의 한 병원에서 사망 소식이 갑작스럽게 알려지며 큰 충격을 안겨주게 된다. 원인은 암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탈리아 음악계의 큰 별이었던 바티스티의 죽음은 이탈리아 사람들로 부터 큰 슬픔을 안겨주었다. 바티스티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잘 알려져 있었던 뮤지션 중 한명임을 떠나, 만약 그가 없었다면 이탈리아 팝/록 음악계가 현재보다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평가받을 정도로 거의 이탈리아 역사상 최고의 뮤지션 중 한명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실제로 [[데이비드 보위]]는 바티스티를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뮤지션 중 한명으로 손꼽기도 했으며, 이외에도 많은 세계적인 인사들로 부터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고, 현재도 그의 많은 곡들이 수 많은 뮤지션들로 부터 리메이크 되는 등 입지를 확고히 하고 있는 뮤지션이다. 바티스티의 사후, 21세기에는 바티스티의 여러 컴필레이션들이 만들어지며 미공개곡들이 공개되기도 했다. == 디스코그래피 == * Lucio Battisti (1969) * Emozioni (1970) * Amore e non amore (1971) * Umanamente uomo: il sogno (1972) * Il mio canto libero (1972) * Il nostro caro angelo (1973) * Anima latina (1974) * Lucio Battisti, la batteria, il contrabbasso, eccetera (1976) * Io tu noi tutti (1977) * Images (1977) * Una donna per amico (1978) * Una giornata uggiosa (1980) * E già (1982) * Don Giovanni (1986) * L'apparenza (1988) * La sposa occidentale (1990) * Cosa succederà alla ragazza (1992) * Hegel (1994) [[분류:이탈리아 남가수]][[분류:이탈리아의 싱어송라이터]][[분류:1943년 출생]][[분류:1998년 사망]][[분류:암으로 죽은 인물]][[분류:라치오 주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