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오스트리아 총리)] ||<#000000><-2> '''오스트리아 대통령 대행''' || ||<-2><#D81E05>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B51905, #D81E05 20%, #D81E05 80%, #B51905)" '''오스트리아 제13대 총리[br]{{{+1 레오폴트 피글}}}[br]Leopold Figl'''}}}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레오폴트 피글.jpg|width=100%]]}}} || ||<|2> '''출생''' ||[[1902년]] [[10월 2일]] ||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미헬하우젠 루스트 || ||<|2> '''사망''' ||[[1965년]] [[5월 9일]] (향년 62세) || ||[[오스트리아]] [[빈(오스트리아)|빈]] || || '''국적''' ||[[파일:오스트리아 국기.svg|width=28]] [[오스트리아]] || ||<|6> '''임기''' ||<#f5f5f5>오스트리아 총리 || ||[[1945년]] [[12월 20일]] - [[1953년]] [[4월 2일]] || ||<#f5f5f5>오스트리아 대통령 || ||[[1950년]] [[12월 31일]] - [[1951년]] [[6월 21일]] || ||<#f5f5f5>오스트리아 외무부 장관 || ||[[1953년]] [[11월 26일]] - [[1959년]] [[6월 9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소속 정당''' ||[include(틀:오스트리아 인민당)] || || '''학력''' ||빈 천연자원 및 생명공학 대학교 || || '''약력''' ||오스트리아 총리[br]오스트리아 대통령 대행[br]오스트리아 외무부 장관[br]니더외스터라이히 주지사 || }}}}}}}}} || [목차] [clearfix] == 개요 == [[오스트리아]]의 정치인. 총리와 대통령, 외무장관직을 차례로 역임했다. 오스트리아의 중립화를 이끈 외교관이다. == 생애 == 1902년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농민협회에서 활동했다. 이때 후일 오스트리아의 총리가 되는 [[엥겔베르트 돌푸스]]를 만나 그의 측근이 된다. 1930년 [[조국전선]]에 입당하고, [[엥겔베르트 돌푸스]] 밑에서 일하며 독재 정권에 부역하였다. 엥겔베르트 돌푸스 정권 하에서는 연방 경제 정책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엥겔베르트 돌푸스]]가 암살되고 [[안슐루스]]로 나치독일과 오스트리아가 합병되자, 나치독일과의 합병을 결사 반대했던 그는 나치당의 탄압을 받게 되었다. 1938년 안슐루스 직후 레오폴트 피글은 나치당 정권에 체포되어 다카우 강제수용로도 보내졌다가, 1943년 5월 석방되었다. 1944년 다시 체포되어 빈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1945년]] [[소련군]]에 의해 기적적으로 사형 직전에 석방된다. 1945년 소련군 치하에서는 [[빈(오스트리아)|빈]] 시민들에게 식량을 배급하는 업무를 받게 되어 시민들의 신임을 얻었다. 1945년 [[오스트리아 인민당]] 창당에 주된 역할을 해 인민당의 부대표직에 올랐으며, 얼마 안가 [[니더외스터라이히]]의 임시 주지사와 오스트리아 부총리직에도 오른다. 1945년 치러진 첫 총선에서 [[오스트리아 인민당]]이 다수당이 됨에 따라, [[카를 레너]]를 잇는 오스트리아의 13대 총리로 취임하게 되었다. 총리 임기 동안에는 [[마셜 플랜]]으로 무너진 오스트리아 경제를 되살리는데 주력해 약 8년동안 장기 집권을 하게 되었다. [[1950년]] [[12월 31일]] [[카를 레너]] 오스트리아 대통령이 급서하자 약 6개월동안 임시 대통령 대행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1953년]] 오스트리아 파시즘 정권 부역 행위로 당 내 비판을 받아 총리직을 사임하고, 이후 약 6년동안 외무장관직을 맡았다. 오스트리아의 영구 중립국 선언은 그의 대표적인 업적으로 꼽힌다. 1959년 외무장관직에서 물러난 이후 1962년까지 [[니더외스터라이히]]의 주지사직을 맡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주지사직에서 물러나고 정계를 은퇴했다. 1965년 신장암으로 사망했다. == 평가 == 오스트리아의 경제를 복구하고 중립국 선언을 통해 오스트리아의 전후 회복을 이끈 정치인이지만, 동시에 1930년대 파시즘 정권에 부역한 어두운 면이 있다. 또 당대의 여느 오스트리아 정치인들과 마찬가지로 나치 독일 인사들을 제대로 청산하지 않은 것 역시 비판받는다. 그러나 대부분의 오스트리아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그저 평범하고 무난했던 경제 회복의 공로자 정도로 인식되고 있으며, 2020년 로마 가톨릭 교구에 의해 '하나님의 종'(Servus Dei) 칭호를 받은 것을 보면 그렇게 인식이 나쁘지는 않은 듯 하다. [[분류:1902년 출생]][[분류:1965년 사망]][[분류:신장암으로 죽은 인물]][[분류:오스트리아의 정치인]][[분류:오스트리아 총리]][[분류:오스트리아 대통령]][[분류:니더외스터라이히 주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