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미국 국무장관)]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172172 0%, #1A2478 20%, #1A2478 80%, #172172)" '''[[국무장관|{{{#ffc224 미합중국 제54대 국무장관}}}]][br]{{{#ffc224 {{{+1 데이비드 딘 러스크}}}[br]David Dean Rusk}}}'''}}}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Dean_Rusk.jpg|width=100%]]}}}|| ||<|2> {{{#ffc224 '''출생'''}}} ||[[1909년]] [[2월 9일]] || ||[[미국]] [[조지아주]] 체로키 카운티 || ||<|2> {{{#ffc224 '''사망'''}}} ||[[1994년]] [[12월 20일]] (향년 85세) || ||[[미국]] [[조지아주]] 아테네 || || '''{{{#ffc224 국적}}}''' ||[[파일:미국 국기.svg|width=28]][[미국]] || || '''{{{#ffc224 직업}}}''' ||[[정치인]] || ||<|2> {{{#ffc224 '''재임기간'''}}} ||제54대 국무장관 || ||1961년 1월 21일 ~ 1969년 1월 20일 || || '''{{{#ffc224 서명}}}''' ||[[파일:딘 러스크 서명.svg|width=150]] || || '''{{{#ffc224 정당}}}''' ||[include(틀:민주당(미국))] || || '''{{{#ffc224 학력}}}''' ||[[데이비슨 칼리지]](-1931년)[*학사][br][[옥스퍼드 대학교]] 세이트존스 칼리지[*석사](-1933년)[br][[캘리포니아 대학교/버클리 캠퍼스|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로스쿨|법학대학원]][*박사](-1940년)|| || '''{{{#ffc224 약력}}}''' ||제1대 국무부 국제업무부 차관보,,(1949),,[br]제2대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부 차관보,,(1950-1951),,[br]'''미국 제 47대 국무장관''',,,(1961-1969),,, || [목차] [clearfix] == 소개 == 미국의 정치인. 1961년부터 1969년까지 [[존 F. 케네디]]와 [[린든 B. 존슨]] 대통령 아래에서 8년간 국무 장관을 역임했다. 전임자인 [[딘 애치슨]]과 [[존 포스터 덜레스]], 후임자인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 등과 함께, 냉전 시대 미국의 외교사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 생애 == [[조지아주]] 체로키 카운티에서 태어났다. [[1925년]] 보이즈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애틀란타]]의 변호사 사무소에서 일하다가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데이비드슨 대학교에 진학하여 [[1931년]] [[정치학]] 전공으로 졸업하고, 1933년부터 1934년까지 [[로즈 장학생]]으로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 옥스퍼드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한 후, [[캘리포니아 대학교/버클리 캠퍼스|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로스쿨로 진학하여 1940년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캘리포니아 주의 밀스 칼리지의 정치학 교수가 되었고 1938년 학부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에 장교로 종군하였고, 1945년 8월 전략정책단 정책과 과장으로 있을 때, [[일본군]]의 항복 조건들이 담긴 항복문서 '일반명령 제1호' 가운데 [[한반도]]와 극동 지역에 관계된 부분의 초안 작성 임무를 맡았다. 1946년 [[국무부]]에 들어가 [[마셜 플랜]]과 [[북대서양 조약 기구]]의 설립 업무를 담당했다. 1950년부터 1952년까지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담당국 차관보를 맡았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극동국 섭외관 브래들리 코너스(W. Bradley Connors)로부터 전쟁 발발 사실을 보고받고, 주한 미국 대사 존 무초에게 UP통신사의 서울주재 특파원 잭 제임스(Jack James)가 타전한 기사(전쟁 발발)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1952년부터 1960년까지 록펠러 재단의 이사장을 지냈다. [[파일:external/www.jenewsphotos.com/20100701152102_00001.jpg|width=400]] (소련의 [[안드레이 그로미코]] 외무장관과 함께) 1961년 케네디 정권이 들어서자, 54대 국무 장관에 취임하였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에는 외교 수장임에도, [[쿠바]]에 대한 공습 등의 군사적 조치의 우선 동원을 지지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국방부의 [[로버트 맥나마라]] 장관은 공습보다는 온건한, 봉쇄 우선론을 주장했고, 다행히도(!) 이 주장이 관철되었다. ~~어째 뒤바뀐 느낌~~] 후임인 린든 존슨 대통령의 취임 후에도 장관직을 유지했고, 1960년대 [[베트남 전쟁]] 정책을 대외적으로 대표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장관직을 떠난 후, 1970년 조지아 대학교의 국제법 교수가 되었다. 1994년 12월 20일 조지아 주의 아테네에서 8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 한국과의 악연 == 한국 입장에서는 역사상으로 악연이 많은 인물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 당시 한반도를 분할하는 38선의 아이디어를 직접 제공한 장본인이었고,[* 당시 러스크와 함께 38선 설정의 아이디어를 냈던 인물 중에는 이후 1960년대에 주한미군 사령관이 된 찰스 본스틸도 있었다.][* 미국의 당초 계획은 한반도 분할선이긴 한데 더 북쪽에 있는, 대략 통일신라-발해 경계와 비슷한 39선을 계획하고 있었다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판단하에 38선으로 내려왔다. 자세한 내용은 [[삼팔선]] 문서 참조. 39선으로 분할했더라면 [[황해도]]와 [[강원도]] 북부, 항구도시 [[남포시|진남포]]를 포함한 [[평안남도]] 남쪽 16%는 남한(대한민국)이 건질 수 있었다.] 1950년대 초 국무부 차관보 시절에는 독도 문제에 있어서 일본측에 동조하며 [[러스크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국무장관으로 재직하던 1968년에는 한국이 요구하는 [[1.21 사태|1.21 청와대 습격미수 보복]]은 무시한채, [[푸에블로호 피랍사건|푸에블로호 사건]]으로 피랍된 미군들의 석방을 위한 북한과의 협상에만 골몰하여 미국의 방위공약에 대한 불신을 키우는 단초를 제공했다. [[분류:미국 국무장관]][[분류:1909년 출생]][[분류:1994년 사망]][[분류:체로키 카운티(조지아 주) 출신 인물]][[분류:미국의 군인]][[분류:제2차 세계 대전/군인]][[분류:미국 민주당 소속]][[분류:옥스퍼드 대학교 출신]][[분류:UCB 로스쿨 출신]][[분류:데이비슨 칼리지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