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현대신학)] ||<-2> '''{{{+1 디트리히 본회퍼}}}[br]Dietrich Bonhoeffer''' || ||<-2>{{{#!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디트리히 본 회퍼.jpg|width=100%]]}}}|| ||<|2> '''출생''' ||[[1906년]] [[2월 4일]] || ||[[독일 제국]] 브레슬라우[br] {{{-2 (現 [[폴란드]] [[브로츠와프]])}}} || ||<|2> '''사망''' ||[[1945년]] [[4월 9일]] {{{-2 (향년 39세)}}} || ||[[나치 독일]] [[바이에른|바이에른 주]] 플로센뷔르크 수용소 || || '''직업''' ||[[신학자]], 저술가|| || '''종교''' ||[[개신교]] {{{-2 ([[루터교회]])}}}|| || '''학력''' ||[[튀빙겐 대학교]] {{{-2 ([[신학]] / [[박사]])}}}[br][[베를린 대학교]] {{{-2 (신학 / 박사)}}}|| || '''부모''' ||아버지 카를 본회퍼[br]어머니 파울로 본회퍼|| || '''축일''' ||[[4월 9일]]|| [목차] [clearfix] == 개요 == [[독일]] [[루터교|루터교회]] [[목사]]이자 [[신학]]자. [[나치 독일]] 시절, [[나치]]의 폭정에 반대한 고백교회(Bekennende Kirche)의 설립자 중 한 사람이었으며, 영화 [[작전명 발키리]]로 잘 알려진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가담했던 주요 인사 중 한 명이었다. [[성공회]]에서는 [[성인(기독교)|성인]]으로 추대되고 있다. 축일은 4월 9일. == 생애 == === 목사가 되기까지 === 그는 [[1906년]] [[2월 4일]], [[독일]] 제국의 브레슬라우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루터교회]]에 뿌리를 둔 전통적인 [[개신교]] 가문이었다. 할아버지는 [[프로이센]] 왕실의 궁정 목사였고, 어머니 파울라도 자녀들에게 성서 이야기, 시, 노래를 가르칠 정도로 믿음과 교양이 모두 훌륭하였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신앙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고 하며, 그가 신학도의 길을 걸어가려 하자 극렬하게 반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튀빙겐 대학교]][* 독일의 명문 신학교로 잘 알려져 있으며, 한국에서는 [[한신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들 중에 이 학교 출신들이 많다.]와 [[베를린 대학교]]에서 신학을 수학했다. 워낙 신학자로서 뛰어난 재능을 보여 당시 [[자유주의 신학]]의 거두였던 아돌프 폰 하르낙의 촉망받는 제자였고[* 그러나, 본회퍼는 자유주의 신학에 반대했다. 오히려 [[칼 바르트]]와 더 가깝다. 그런데도 일부 근본주의 신학자들은 본회퍼마저 자유주의 신학자로 매도하고 있다.] "성도의 교제"(Sanctorum Communio)라는 제목의 졸업논문을 제출했다. 이후 [[로마]]에서 공부하면서 가톨릭의 [[전례]]를 경험하기도 한 그는 25세부터 목사 안수를 주는 루터교회의 법에 의거하여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후 [[미국]]의 유니온 신학교에서도 공부를 하면서 그 곳에서 평화주의에 대하여 깊이 고민하게 된다.[* 당시의 유니온 신학교도 자유주의 신학이 대세였다. 그런데 그 분야의 거두에게 직접 수학하였던 본회퍼가 보기에 그저 근본주의 진영을 깔보기만 하는 유니온 신학교의 모습이 우습게만 보였다.] === [[나치 독일]] 치하에서 === 당시 [[독일]]은 [[아돌프 히틀러]]의 등장과 더불어 나라가 굉장히 혼란스러웠던 시기였다. 특히 히틀러가 집권하면서 당시 독일 교회는 히틀러를 구세주로 고백하며 그의 정책을 맹목적으로 추종할 정도로 급격히 우경화되고 있었다. 이 혼란스러운 시기에 그는 뜻을 같이 하는 이들과 함께 이에 저항하는 교회인 "고백교회(Bekennende Kirche)"를 설립하고 고백교회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지속하며 기독교 신앙의 회복을 위해 활동했다. 그러나 당국은 그에게 감시의 손길을 늦추지 않고 있었고, 곧 교수직과 목회 자체에 대해서도 조금씩 제제를 가하고 있었다. 이 시기의 독일 남성은 [[징병제|반드시 군복무]]를 해야만 했다. 평화주의자이며 반나치사상가였던 본회퍼에게도 위기가 오는가 싶었다. 그러나 [[빌헬름 카나리스]] [[제독]]이 손을 써서 본회퍼는 [[아프베어]][* 독일 해외방첩청] 소속으로 [[영국]]에 파견을 나가는 것으로 복무를 대신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정기적으로 [[독일 국방군]]에 영국에 대한 동향 보고서를 작성하고, 평일에는 자유로이 신학을 더 깊이 공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독일의 상황은 점점 악화되고 있었고, 그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그에게 [[망명]]을 권유했다. 특히 [[미국]] [[뉴욕]]의 유니온 신학교에서는 그에게 연구교수직을 제안했다. "학생을 가르치지 않아도 좋으니 학교에서 연구활동에 전념하라"는 것이었고, 일단 독일을 탈출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동포들이 어둠 속에서 시달리고 있다. 누군가는 그들을 섬겨야 한다"고 하며 이러한 제안을 정중히 거절하고 독일로 귀국하기에 이른다. === 반 나치 운동과 히틀러 암살 작전 === 독일로 돌아온 그는 더욱 상황이 어려워진 고백교회에서 계속 활동하면서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이들의 이러한 활동은 탄압받기 시작했고,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며 주요 인사들에게 체포령이 내려 많은 수의 인사들이 체포되기에 이른다. 결국 고백교회는 지하로 내려가 활동을 하게 되었고, 본회퍼 역시 활동을 줄이기에 이른다. 이를 잘 알 수 있는 기록이 있다. 1940년 9월, [[나치]]는 "본회퍼의 행동이 국민을 분열시킨다"는 이유로 발언 금지 조치를 내리고 관할 경찰서에 주소지를 의무적으로 신고할 것을 명령했다.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회퍼는 그가 옳다 여기는 일을 쉬지 않았다. 1941년 10월, [[베를린]]에서 본격적으로 유대인들이 추방당하기 시작하자, 이들을 방첩대 요원으로 위장하여 구출하는 '작전 7'을 수행했다. 그러던 중 1943년 1월 13일, 마리아 폰 베데마이어와 약혼하고 가정을 꾸리기로 했으나, 안타깝게도 4월 5일, 게슈타포의 가택수색으로 한스 폰 도나니 부부, 요제프 뮐러 부부와 함께 체포되고 말았다. 이 와중에 1944년,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은 히틀러 암살을 기획하게 된다. 만약 암살이 성공하면, 군부를 신속히 장악하고 친위대를 제압한 후, 카나리스 제독이 본회퍼를 통하여 영국에 선을 넣어 강화협정을 진행할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계획은 실패하고 만다. 자세한 내용은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항목 참조. 결국 이에 광분한 히틀러는 [[장검의 밤]]보다 더한 복수를 하겠다고 날뛰었고, 포위망은 옥죄어져 왔다. 결국 본회퍼 역시 체포되었다. 초기에는 감옥에서 저술활동도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었고, 감옥에서의 대우도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조금씩 증거들이 발견되면서 그에 대한 처우 역시 조금씩 악화되기 시작했고, 결국 결정적인 증거가 발견되면서 그 역시 처벌을 피할 수 없었다. 결국 '''종전을 겨우 한 달 앞둔''' 1945년 4월 9일 새벽, 플로센뷔르크(Flossenbürg) 강제수용소에서 교수형으로 처형된다. 그의 묘비에는 "'그의 형제들 가운데 서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한편 그의 본거지인 브레슬라우는 2차대전 이후 [[폴란드]]령이 되어 [[브로츠와프]]라 불리는데, 폴란드 공산정권 몰락 이후 그를 기념하기 위해 생가에 기념물과 기념판을 만들었다.[* [[독일어]] 옆에 [[폴란드어]]로 된 기념판이 걸려 있는 웃지 못할 형상이다.] 그러나 대부분이 [[가톨릭]] 교인들이고 반독 감정이 어지간히 강한 폴란드인들은 [[가톨릭]]교도도, 폴란드인도 아닌 독일인 루터교 목사 본회퍼를 기념하는 데에 적지 않은 거부감이 있다. == 어록 == >'''악을 보고도 침묵하는 것은 그 자체가 악이다.''' >'''[[아돌프 히틀러|미친 운전자]]가 행인들을 치고 질주할 때, 목사는 사상자의 장례를 돌보는 것보다는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핸들을 뺏어야 한다]].'''[* 이 말은 [[개신교 우파#s-2.3.2|한국 개신교 우파]] 내지 [[전광훈]] 목사가 이끄는 [[문재인하야범국민투쟁본부]]에서 "미친 자에게 운전대를 맡길 수 없다"라는 표현으로 사용된다. 여담으로 전 목사는 자신을 본회퍼로 빗대어 말하는데, 정작 보수 성향의 정통 교단은 본회퍼를 반대하고 있다.] >'''나는 누구인가? 고독하게 던지는 물음이 나를 조롱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당신은 아시오니,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오 하나님!''' >'''사랑이 있는 곳에 삶의 의미는 충분하다.''' >Der Sinn des Lebens ist erfüllt, wo Liebe ist. >'''이로써 끝입니다. 하지만, 나에게는 삶의 시작입니다.''' >Das ist das Ende — Für mich der Beginn des Lebens. >---- >[[유언]] == 기타 == 오늘날에는 주로 반독재 투쟁에 헌신한 순교자로 기억되는 인물이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신학자였다. 이미 젊은 나이부터 어마어마한 재능을 인정받을 정도로 촉망받는 신학자였기에, 신학계에서는 그가 좀더 왕성한 활동과 성과를 이루지 못한 채 목숨을 잃었던 것을 두고두고 안타깝게 여기고 있다. 현재 그의 신학서적은 고백교회 시절 신학교 교재로 사용하기 위하여 집필한 성도의 공동생활(Gemeinsames Leben)과 "값싼 은혜" 문제를 비판하는 책인 나를 따르라(Nachfolge)[* 이 책은 1936년, 그가 [[베를린 대학교]] 신학부 교수의 자격으로 행한 마지막 강의의 내용이다. 이후 나치 독일은 그의 교수직을 박탈해 버렸다. 원제인 Nachfolge는 '제자들', 혹은 '후계자들'이라는 뜻이다.][* 이 책의 영어 제목은 'The Cost of Discipleship, 즉 번역하자면, '제자도의 대가'이다.], 그리고 그가 수용소에서 가족에게 보냈던 편지들을 한데 묶은 "옥중서신 : 저항과 복종(Widerstand und Ergebung)"이 그의 사후 출판되었다. 이 책들은 현재 모두 번역되어 있다. 한국에서는 대한기독교서회에서 '디트리히 본회퍼 선집'을 출판했으며, 그의 측근인 에버하르트 베트게 목사가 집필한 전기 '복있는 사람'이 출간되었다. 그 외에 다양한 책들이 '좋은씨앗'과 '복있는 사람'을 중심으로 출판되어 있어서 본회퍼의 사상을 쉽게 연구할 수 있다. 간혹 "본 회퍼"로 잘못 표기하는 경우도 눈에 띈다.[* 독일을 비롯한 게르만계 귀족의 이름에 '폰'이 쓰이는데(예: [[오토 폰 비스마르크]]), 귀족 가문과는 거리가 먼 본회퍼도 같은 경우인 줄로 착각해서 벌어지는 일. 게다가 귀족계 이름에 쓰이는 '폰'이 알파벳 V(on)인 반면, '본회퍼'는 알파벳 B(onhoeffer)로 표기된다는 것도 차이점이다.] [youtube(kzdzxstTITA)] 2000년에 그의 생애를 다룬 영화가 제작되기도 했다. === 노래 === 1944년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으로 구속된 후 옥중에서 쓴 시이자 기도문으로 최근 한국 개신교에서 [[CCM(음악)|CCM]]으로 많이 등장하는 '선한 능력으로'라는 찬송가가 있다. * [youtube(EYtSflE5bpw)] 독일어 버전 * [youtube(h0sWKvPG04k)] 한국어 버전 [[분류:제3제국/인물]][[분류:루터교회 목사]][[분류:개신교 신학자]][[분류:개신교 순교자]][[분류:1906년 출생]][[분류:1945년 사망]][[분류:성공회 성인]][[분류:루터교회 성인]][[분류:독일의 목사]][[분류:홀로코스트 피해자]][[분류:튀빙겐 대학교 출신]][[분류:베를린 훔볼트 대학교 출신]][[분류:브로츠와프 출신 인물]][[분류:교수형된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