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오늘날의 독일 연방 공화국, rd1=독일)] [include(틀:독일의 역사)] [include(틀:오스트리아의 역사)] ||<-3> {{{#000 {{{+1 '''독일 연방'''}}}[br]'''Deutscher Bund'''}}} || ||<-2> [[파일:독일 국기(3:2 비율).svg|width=100%]] || [[파일:독일 연방 국장.svg|width=100%]] || ||<-2> '''{{{#000 국기}}}''' || '''{{{#000 국장}}}''' || ||<-3> [[파일:독일 연방.svg|width=100%]] || ||<-3> '''{{{#000 1815년 ~ 1866년}}}''' || ||<-2> '''{{{#000 성립 이전}}}''' || '''{{{#000 붕괴 이후}}}''' || ||<-2> [[오스트리아 제국|'''{{{#000 오스트리아 제국}}}''']] || [[오스트리아 제국|'''{{{#000 오스트리아 제국}}}''']] || ||<-2> [[프로이센 왕국|'''{{{#fff 프로이센 왕국}}}''']] || [[북독일 연방|'''{{{#fff 북독일 연방}}}''']] || ||<-2><|5> [[라인 동맹|'''{{{#fff 라인 동맹}}}''']] || || [[헤센 대공국|'''{{{#fff 헤센 대공국}}}''']][* 남부지역 한정.] || || [[바이에른 왕국|'''{{{#fff 바이에른 왕국}}}''']] || || [[바덴 대공국|'''{{{#fff 바덴 대공국}}}''']] || || [[뷔르템베르크 왕국|'''{{{#fff 뷔르템베르크 왕국}}}''']] || ||<-3> {{{#000 '''역사'''}}} || ||<-3> '''1815년 설립 [br] 1866년 붕괴''' || ||<-3> {{{#000 '''지리'''}}} || || {{{#000 '''위치'''}}} ||<-2>[[오스트리아]], [[체코]], [br] [[독일]], [[리히텐슈타인]], [br] [[룩셈부르크]] || || {{{#000 '''수도'''}}} ||<-2>[[프랑크푸르트]] || ||<-3> {{{#000 '''인문환경'''}}} || || {{{#000 '''인구'''}}} ||<-2>24,900,000명(1820년)|| || {{{#000 '''언어'''}}} ||<-2>[[독일어]] || || {{{#000 '''민족'''}}} ||<-2>[[독일인]], [[오스트리아인]], [[체코인]], [[슬로베니아인]], [[이탈리아인]], [[폴란드인]], [[덴마크인]] 등 || || {{{#000 '''종교'''}}} ||<-2>[[가톨릭]], [[개신교]] || ||<-3> {{{#000 '''정치'''}}} || || {{{#000 '''정치체제'''}}} ||<-2>[[국가연합]] || || {{{#000 '''국가원수'''}}} ||<-2>[[의장]][* [[오스트리아 제국]]의 [[카이저|황제]]가 독일 연방의 의장을 겸임했다.] || ||<-3> {{{#000 '''경제'''}}} || || {{{#000 '''통화'''}}} ||<-2>탈러(Thaler) || [목차] [clearfix] == 개요 == [[1815년]] [[빈 회의]]를 통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의해 붕괴된 [[신성 로마 제국]]을 대체하는 한편, [[독일어권]] 국가들[* 19세기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이 복잡한 지역을 설명하기 위해 [[독일어권]] 지역이라는 표현을 썼지, '독일'이라는 하나의 통일된 나라라는 개념은 유럽인들 사이에서 없었다. 심지어 독일인들 사이에서도!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이 시기 각종 사료에는 '독일'을 복수형으로 사용했으며('독일들'), 단수로서 '독일'이라는 표현은 등장하지 않는다. '독일어권' 이 아닌 통일된 국가로써의 '독일' 개념이 쓰이기 시작한 것은 [[1848년 혁명]] 때부터이다.] 사이의 산업 문제를 조정하기 위해 새로 설립된 [[국가연합]]. 총 39개 국가들이 참여했으나, 연방을 주도하는 맹주는 [[오스트리아 제국]]과 [[프로이센 왕국]]이었다. 이후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사이의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이후 오스트리아가 이 연방에서 축출되고, 프로이센이 일부 국가들과 [[북독일 연방]]을 설립하면서 붕괴됐다. [[독일 제국]]의 모태 역할을 했다고 볼 수도 있다. 독일 연방은 편의상 '[[연방]]'이라고 번역하고는 있으나, 사실은 연방 국가(federation)가 아니라 [[국가연합]](confederation)이었다. [[한국어]]에서 연방으로 번역되는 정치체(政治體, polity) 중에 실제로는 연방 국가가 아닌 경우가 꽤 많으니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와는 별개로 [[독일어]]로는 연방과 국가연합을 둘다 분트(Bund)로 표현하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번역 자체가 아예 틀린 건 아니다. == 역사 == === 배경 === [[1803년]]부터 [[1815년]]까지 지속된 [[나폴레옹 전쟁]]에서 [[오스트리아 제국군|오스트리아군]]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참패하게 되어, [[프란츠 2세]]가 퇴위하고 [[신성 로마 제국]]은 1,000년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독일과 [[프랑스 제1제국|프랑스]] 사이에 완충지대를 위해 그 유명한 [[라인 동맹]]을 세웠다. 아이러니하게도 나폴레옹에게 깨져서 반강제로 이 라인 동맹에 가입한 독일의 여러 국가들이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이후 다시금 프랑스에 대항하여 싸우기 위해 동맹을 맺은 것이 독일 연방의 모체가 된다. === 탄생 === 마침내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유럽]]의 구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벌어진 [[빈 회의]]를 통해 [[1815년]] [[6월 8일]] 독일 연방이 공식적으로 출범했다. [[프로이센 왕국]]의 모든 영역을 포함하고 [[오스트리아 제국]]의 모든 영역을 제외한 독일 연방의 인구는 24,900,000명으로 이미 인구가 많이 증가해서 영향력은 높았다. === [[3월 혁명|1848년 혁명]]: 흔들림의 시작 === 외교적 타협과 균형의 달인이었던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의 인생 최고의 걸작이었던 만큼 처음 30여 년 간은 그럭저럭 잘 돌아갔다. 하지만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는 빈 체제의 억압적인 상황에서도 점점 더 커지고 있었고, [[1848년]] [[2월]] [[7월 왕정|프랑스]]에서 [[프랑스 2월 혁명|혁명]]이 일어나자, 그 열기는 독일로까지 곧바로 옮겨왔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독일을 휩쓸던 혁명의 열기에 겁을 먹고 민주적인 의회와 새로운 헌법, 통일된 독일을 약속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하지만 이 성명을 바탕으로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열린 의회에서 각 독일의 대표들은 [[소독일주의]]와 [[대독일주의]] 문제로 입씨름만 하면서 6개월 넘는 금쪽 같은 시간을 낭비하고(...), 이 틈을 노린 보수 반동세력들의 반격이 시작됐다. [[프로이센군]]은 여전히 프로이센 국왕에게만 충성을 맹세했고 사회의 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은 별 관심없는(...) 상황에서,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프랑크푸르트 의회가 준 통일 독일 황제의 자리를 거부하고[*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왕권신수설]]을 진심으로 믿는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이 '폭도'들이 준 왕관을 받을리가...] 자유주의자들을 무자비하게 때려잡는다. 자유주의자들을 때려잡는 데 성공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자신감을 되찾고 왕과 귀족 세력에게 모든 권력을 집중시킨 새로운 헌법을 발표하면서 독일 연방을 해체하고 프로이센 위주의 [[북독일 연방]]을 세우려했지만 [[올뮈츠의 굴욕|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반대로 실패]]... 그리고 이 앙금이 결국 전쟁으로까지 이어졌다. === 붕괴 === 연방의 주도권을 놓고 사사건건 으르렁거리던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사이의 다툼은 결국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으로 이어지고, 패배한 오스트리아는 연방에서 ~~강퇴~~축출되면서 연방은 [[북독일 연방]]과 남부 4개국으로 재편된다. 그 후 [[북독일 연방]]은 [[1870년]] [[독일 제국]]으로 국명을 바꾸고 남부 4개국을 가입시킨 다음, 황제로 프로이센 국왕인 [[빌헬름 1세]]를 추대했다. 그리고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을 승리로 장식한 직후인 [[1871년]] [[1월 18일]]에 [[베르사유 궁전]]에서 [[빌헬름 1세]]는 공식적으로 통일 [[독일 제국]]의 출범을 선포했다. == 구성국 == 아래 구성국들 중에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독일 연방에 속하지 않은 영토도 많이 가지고 있었다.[* [[오스트리아 제국]]은 [[헝가리 왕국]], [[트란실바니아 대공국|에르데이 대공국]], [[부코비나 공국]],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 [[프로이센 왕국]]은 [[동프로이센]]과 [[서프로이센]], [[포젠]].] 이들 지역 대부분이 과거 신성 로마 제국의 영역 밖에 있었던 지역들이어서 독일 연방에서도 제외된 것.[* [[동프로이센]]과 [[서프로이센]]은 [[신성 로마 제국]] 시절에도 [[폴란드 왕국]]과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영토였다.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브란덴부르크 선제후]]였던 [[호엔촐레른 가문]]이 프로이센 국왕을 칭한 이유도 본토인 브란덴부르크는 신성 로마 제국 안에 있어 왕을 칭할 수 없었기 때문에 외지였던 프로이센의 이름을 따와서였다.] 그러나 두 나라의 영향력은 압도적이라서 군대만 하더라도 독일연방군 11개 군단(10개 상비군단+1개 예비군단) 가운데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각각 3개 군단씩을 가지고 있었다. * 제1구: '''[[오스트리아 제국]]''': 오스트리아 제국 황제가 연방 의장을 겸직. * 제2구: '''[[프로이센 왕국]]''' * 제3구: '''[[바이에른 왕국]]''' * 제4구: [[작센 왕국]] * 제5구: [[하노버 왕국]]: [[1837년]]까진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영국]]의 왕이 하노버 왕국의 왕을 겸했기 때문에 사실상 [[영국 국왕]]이 표를 행사했다. 이후 [[1837년]]에 [[빅토리아 여왕]]이 즉위하면서 [[살리카 법]]이 적용되던 하노버 왕국에는 빅토리아 여왕의 삼촌, 에른스트 아우구스트가 즉위하면서 영국과의 동군연합이 해체되었다. * 제6구: [[뷔르템베르크 왕국]] * 제7구: [[바덴 대공국]] * 제8구: 헤센 선제후국(헤센-카셀) * 제9구: [[헤센 대공국]](헤센-다름슈타트) * 제10구: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국+라우엔부르크 공국: [[덴마크 국왕]]이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작으로서 참여했다. [[1864년]]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에서 [[덴마크]]가 패배하여 덴마크 국왕이 홀슈타인 공작의 지위를 포기함으로써 소멸하였다. * 제11구: [[룩셈부르크]] 대공국(+[[림부르크 공국]]): 처음에는 [[네덜란드 국왕]]이 [[룩셈부르크 대공]]으로서 연방 의회에 한 표를 행사했다. 그런데 [[1839년]] 영토의 서쪽 반을 [[벨기에]]에 할양하게 되면서([[뤽상부르(벨기에)|뤽상부르 주]])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벨기에 땅이 된 지역은 연방에서 제외시키는 대신 네덜란드에서 림뷔르흐 지방을 [[림부르크 공국]]으로 분리하여 독일 연방에 [[https://web.archive.org/web/20110423151907/http://www.blikopdewereld.nl/Ontwikkeling/geschiedenis/127-de-geschiedenis-van-nederland/266-deel-11-limburg-en-de-duits-bond.html|새로 편입]]시켰다. 그리고 네덜란드 국왕은 룩셈부르크의 대공 겸 림뷔르흐의 공작으로서 독일 연방 의회에서 한 표를 행사하게 되었다. 이후 [[1866년]] 룩셈부르크 대공국과 림부르크 공국은 독일 연방을 떠났고 후신인 [[북독일 연방]]에 참여하지 않았다. 림부르크 공국은 이듬해 네덜란드에 재흡수되었다. 다만 룩셈부르크는 [[독일 제국]]이 멸망하는 [[1919년]]까지 독일관세동맹에 남아 있었다. * 제12구: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국]]+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국 →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 1826년, 작센고타알텐부르크 공가의 대가 끊기면서 에른스트계 공국들간에 영지 교환 및 합병이 일어났고 이때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국은 잘펠트 지역을 포기하는 대신 더 큰 지역이던 고타 지역을 합병하면서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으로 국호가 바뀌었다.]+작센힐트부르크하우젠 공국 → [[작센알텐부르크 공국]][*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과 마찬가지로 [[1826년]], 작센고타알텐부르크 공가의 대가 끊겼을 때 힐트부르크하우젠 지역을 작센마이닝겐 공국에게 넘긴 대신 알텐부르크 지역을 합병, 작센알텐부르크 공국으로 국호를 바꿨다.]+[[작센마이닝겐 공국]] * 제13구: [[브라운슈바이크 공국]]+나사우 공국 * 제14구: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국]]+[[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대공국]] * 제15구: [[올덴부르크 대공국]][* [[1815년]]에 공국에서 대공국으로 승격했으나 올덴부르크 공작이 대공을 칭하게 된 것은 [[1829년]]부터이다. 당시 올덴부르크를 다스리던 이는 빌헬름 공작이었는데 그는 [[빈 회의]] 이전부터 올덴부르크를 다스리고 있었기 때문에 [[1815년]], 올덴부르크가 대공국으로 승격한 이후에도 계속 공작을 칭했고 그가 사망한 [[1823년]]에 즉위한 빌헬름 공작의 후임, 페터 1세 역시 스스로를 올덴부르크 공작으로 칭했기 때문에 [[1829년]], 페터 1세의 후계자인 아우구투스 대공이 즉위하기 전까지 [[홍철 없는 홍철팀|올덴부르크는 대공국이면서 군주의 칭호는 공작인 상황이 발생했다.]]]+[[안할트 공국]][* 안할트-쾨텐 공국은 [[1847년]]에 안할트-베른부르크에, 안할트-베른부르크 공국은 [[1863년]]에 대가 단절되어 안할트-데사우에 통합되었다.]+[[슈바르츠부르크존더샤우젠 후국]]+[[슈바르츠부르크루돌슈타트 후국]] * [[후국|제16구]]: --호엔촐레른헤칭겐 후국+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후국--[* 둘 모두 [[1850년]]에 프로이센 왕국에 합병]+[[리히텐슈타인|리히텐슈타인 후국]]+[[리페 후국]]+[[로이스그라이츠 후국]]+[[로이스게라 후국]]+[[샤움부르크리페 후국]]+[[발데크피르몬트 후국]]+헤센홈부르크 백국[* [[1820년]]에 가입하였으나 [[1866년]] [[헤센 대공국]]에 통합되었다.] * [[자유시|제17구]]: [[브레멘]]+[[프랑크푸르트]]+[[함부르크]]+[[뤼베크]][* 모두 [[1820년]]에 가입하였다.] == 정치 == === 연방 의회 === 독일 연방을 구성하는 나라가 많은 것에 비해 연방 의회의 의석은 17석뿐이었다. 규모가 크거나 외국 왕이 [[동군연합]]인 나라 11개는 한 표씩 행사했고, [[베틴 가문]]의 에른스트 계열 국가가 1표, 메클렌부르크의 2개 대공국이 1표, 브라운슈바이크+나사우와 올덴부르크+안할트가 1표씩, 나머지 공령들이 전부 연합해서 1표, [[자유도시]] 4개가 1표를 나눠가졌다. === 역대 의장 === [include(틀:역대 독일 연방 의장)] ||대수||이름||재위기간|| ||1||[[프란츠 2세|프란츠 1세]]||1815~1835|| ||2||[[페르디난트 1세(오스트리아 제국)|페르디난트 1세]]||1835~1848|| ||3||[[프란츠 요제프 1세]]||1850~1866|| 1848년부터 1850년까지는 프랑크푸르트 의회가 실권을 가졌다. == 경제 == ~~경제라고 쓰고 관세동맹이라고 읽는다~~ 당연히 실제로는 경제적인 문제가 이렇게 단순하지는 않았지만, 독일 연방에서 연상되는 것이 [[관세동맹]]이라고 할 수는 있다. [[1834년]] 연방의 단결을 증진시킨다는 명분으로 프로이센의 주도하에 [[관세동맹]](Zollverein)이 이루어졌다. ~~농업지주인 [[융커]]들이 사회를 주도하던 프로이센이 이런 관세동맹을 주도했다는 것이 다소 뜬금없이 느껴지지만~~ 관세동맹의 애당초 목적은 경제 문제라기보다는 정치적인 것으로, 프랑스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경향이 강했던 소국들을 연방 내의 경제권으로 편입시킴으로써 추후에 있을지 모를 프랑스의 이간질을 방지하고자 하는 것이 주된 목표였다.[* 또한 프로이센 입장에서는 이런 통 큰 모습을 보여주어서 연방 내 주도권을 놓고 다투고 있던 오스트리아를 견제하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고.] ~~[[나폴레옹 3세]]때 모습을 보면 이 판단이 혜안이었음이 입증됐다...~~ 관세 동맹이 체결된 지 약 10년이 지난 1842년이 되면 거의 모든 연방 내 국가들이 관세 동맹에 가담하게 된다. 그리고 처음 도입할 때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지만, 이런 경제 공동체의 형성은 민족주의자들의 통일운동을 자극하는 한편, 독일 연방 내 국가들 사이[* 단 오스트리아는 제외]의 관세 폐지 및 도량형 통일이라는 성과를 만들어내면서 독일 통일의 초석을 다지는 것으로 이어진다. == 사회 == [[1820년]]에 독일 연방의 인구는 24,900,000명으로 상당히 많았지만 이후에도 [[서유럽]]의 다른 지역에 비해 인구가 조금 더 빠르게 성장했다.[* 오스트리아 제국은 제외한 통계이다.] 이러한 인구 증가에는 각종 농업 기술이 발전하면서 과거와 같은 영양실조 및 기근으로 인한 아사가 크게 줄었던 점을 가장 먼저 꼽을 수 있다. 또한 각종 의학 기술이 발달하면서 유아 사망률이 크게 낮아진 것이 한 몫 했다는 의견도 있다.[* 하층민 사이에서 유아 사망률은 높은 편이었다. 독일 연방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지 30년이 지나고 나서 나온 [[함부르크]] 시 통계를 보면 20~30%의 신생아가 1세를 못 넘기고 사망했다. 이 정도면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중상층 계급에서는 [[출산율]]이 낮아지는 움직임도 동시에 관찰된다.[* 이 시기 [[산업화]]가 점진적으로 진행되면서 출생률과 사망률이 모두 낮아지며 인구 규모가 고착화되는 현상도 관찰된다.] 더불어 [[미국]]으로의 [[이민]]도 이 시기 증가해서 약 30년 동안에만 240만 명이 미국으로 이민을 간 것으로 추산된다. 이름 탓에 [[독일인]]들로만 이루어졌을 거 같지만 정말 엄청나게 복잡한 [[다민족국가]]였다. 물론 독일인들이 수적으로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기는 했다. 우선 홀슈타인 지역에는 [[덴마크인]]이 전통적으로 살고 있었으며, [[룩셈부르크]]에는 [[프랑스어]]를 모어로 삼는 [[벨기에인]], 오스트리아에는 [[체코인]], [[이탈리아인]], [[슬로베니아인]]이, 프로이센에는 [[폴란드인]], [[카슈브인]], [[소르브인]]이 살고 있었다. 게다가 1839년 이후에는 ~~비록 게르만 사촌관계라지만~~ [[네덜란드]]도 연방에 포함됐으니..... 여러 왕실들과 더불어 [[동프로이센]] 지방에서 대규모 농장을 운영하는 [[융커]](Junker)로 대표되는 귀족들이 상류층을 형성했다. 이 융커 계층은 토지 소유권을 바탕으로 지역사회를 장악했을 뿐만 아니라, 법정과 군대 내의 고위직까지 차지하고 있었다. 여기에 면세 혜택과[* 1861년에야 관련법규가 생겨 귀족들도 세금을 내기 시작했다.] 금융지원, 경찰력 행사와 같은 여러 특권을 누린 융커 계층은 [[독일 제국]]의 등장 이후에도 그들의 사회적 위신을 지키는데 성공하며 공무원과 군인 사회를 지배한다. 심지어 군인사회에 대한 지배력은 [[제2차 세계 대전]]때까지도 이어졌다.[* 2차 대전 때 독일군 주요장성들의 출신성분을 보면 융커 출신이 아닌 사람을 찾는 게 더 빠르다. 예를 들면 사막의 여우라 불렸던 [[에르빈 롬멜]]이 있다.] 한편 [[슐레지엔]]과 [[루르]]지방을 중심으로 급속한 산업화가 이루어지면서 거대한 자본을 바탕으로 하는 [[부르주아]] 중산계급도 등장한다. 이들은 표면적으로는 [[프랑스 혁명|1789년]]의 프랑스 부르주아들과는 달리 자신들의 재산을 안정적으로 지키기 위해 귀족들과 결탁한다. 물론 나중에 가면 실질적으로는 별 차이가 없어지긴 한다. 사회 최하층의 주류를 구성한 사람들은 ~~예상했듯이~~ [[소작]]농들이었다. 융커들의 토지에서 소작을 하면서 생계를 이어가던 이들은 융커들이 보낸 대리인~~[[마름]].......?~~의 감시와 함께 이 시기까지도 잔재한 봉건적인 의무들에 시달려야 했고, 여기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프로이센 당국이 [[징병제]]를 실시하면서 이제는 사병으로 병역의 의무까지 져야 하는 등 여러모로 불쌍한 존재였다. 또한 산업화가 이루어지면서 노동자 계층도 형성되기 시작했지만 [[독일 사회민주당]]으로 상징되는 [[마르크스주의]]와 노동운동은 아직 이 시기에는 크게 부각되지 않고 있었다. == 문화 == 독일 문화 역사상 최고의 [[리즈 시절]]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프랑스 혁명]]과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아 문학, 음악, 학문 곳곳에서 대가들이 등장한다. 긴 말이 필요없이 이 시기 활동한 인물들의 목록을 한 번 봐보자. 입이 안 다물어진다. 문학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 [[프리드리히 실러|요한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 폰 실러]] *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 * [[그림 형제]] * [[빌헬름 뮐러]][* 1794~1827. 후기 [[낭만파]]에 속하는 서정 시인으로 [[하인리히 하이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시인이다. 만 32세로 요절하여 만 31세로 죽은 [[프란츠 슈베르트]]와 비슷한 짧은 삶을 누렸다. 그래도, 살아생전에 자신이 쓴 시의 문학적인 가치를 인정받았고 아버지가 고위 관직에 있던, 데사우 명문 가문의 영애 아델하이트 바제도프와 결혼도 했으며 말년에는 학교 선생으로 그럭저럭 넉넉하게 살다가 갔다. 1817년 ~ 1818년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비교적 자유롭고 구속이 없는 이탈리아 민중의 모습을 본 후 [[빈 회의]]와 칼스바트 협약을 통해 독일이 [[빈 체제|구체제]]로 돌아간 것에 대해 실망감을 표시하며 시대 비판적이고 [[자유주의]]적인 민요풍의 시를 많이 남겼다. [[나폴레옹]]에 동조한 [[괴테]]를 줏대없는 [[카멜레온]]이라며 비판하기도 했다. [[그리스 독립 전쟁]]을 적극적으로 응호했기에 '그리스인 뮐러'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그의 아들 막스 뮐러는 동양학자ㆍ비교언어학자 및 <독일인의 사랑>이라는 소설의 저자로 유명하다.] * [[에른스트 호프만]] * [[하인리히 하이네]] 음악 * [[루트비히 반 베토벤]] * [[프란츠 슈베르트]] * [[펠릭스 멘델스존]] * [[로베르트 슈만]] * [[프란츠 리스트]] * [[리하르트 바그너]] * [[요하네스 브람스]] 학문 *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 *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 [[레오폴트 폰 랑케]] * [[알렉산더 폰 훔볼트]] *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분류:독일 연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