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파일:도무환.jpg|width=200px]] || || 성명 ||도무환(都武煥) || || 본관 ||[[성주 도씨]] || || 생몰 ||[[1888년]] [[6월 6일]] ~ [[1919년]] [[6월 5일]] || || [[출생지]] ||경상도 성주목 명암방 해평동[br](현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수촌리)[* 인근의 운정리와 함께 [[성주 도씨]] 집성촌이다.] || || 사망지 ||[[경상북도]] [[성주군]] || ||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도무환은 1888년 6월 6일 경상도 성주목 명암방 해평동(현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수촌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4월 2일 이기정(李基定) 등이 성주읍 장날을 이용하여 3천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전개한 독립만세시위를 벌였을 때, 그는 이 시위에 참가했다가 집에 돌아왔다. 그러던 중 같은 동리의 여우룡(呂又龍), 여왕연(呂旺淵)으로부터 일제 헌병대의 발포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분개한 도무환은 [[여홍연]], 여호진(呂鎬鎭), 여문회(呂文會), 여우룡, 여왕연 등의 동리 사람들과 함께 성주읍 독립만세시위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사람들을 재규합하여 해평동에서 다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4월 2일 오후 11시, 그는 3백여 명의 시위 군중을 인솔하여 해평동 월회당 앞 도로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동리를 행진했다. 이때 별진주재소에서 출동한 일본 경찰이 제지하자, 그는 다음과 같이 일갈했다. >조선인들이 이 같은 독립만세를 부르는 것은 정당한 일이 아니냐! 이것을 제지하려는 너희들의 행동은 참으로 부당한 것이다. 그는 시위 운동을 밤늦께까지 감행한 후 여흥연, 여우룡, 여왕연, 여문희, 여호진과 함께 일본 헌병들에게 체포되었다. 그 후 그는 4월 2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태형 90대를 맞았고 자택에서 태형의 후유증으로 6월 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3년 도무환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성주군 출신 인물]][[분류:1888년 출생]][[분류:1919년 사망]][[분류:성주 도씨]][[분류:건국훈장 애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