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덕수궁)] ---- ||<-3> [[파일:정부상징.svg|width=22]] '''[[대한민국의 사적|{{{#f39100 대한민국 사적 제124호 덕수궁}}}]]''' || ||<-3> {{{#683235 {{{+1 '''덕수궁 돈덕전'''}}}[br]{{{-1 德壽宮 惇德殿}}}}}}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include(틀:지도,장소=덕수궁 돈덕전, 너비=100%, 높이=100%)]}}} || ||<-2> {{{#683235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서울)|중구]] [[세종대로]] 99 ([[중구(서울특별시)/행정#s-4|정동]] 5-1) || ||<-2> {{{#683235 '''건축시기'''}}} || [[1902년]] ~ [[1903년]] {{{-1 (창건) }}}[br][[1921년]] ~ [[1926년]] {{{-1 (철훼) }}}[br][[2023년]] 9월 26일 {{{-1 (복원 및 개관)}}}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돈덕전 복원후.jpg|width=100%]]}}} || || {{{#683235 '''돈덕전'''[* 사진 출처 - [[https://www.chosun.com/culture-life/culture_general/2023/09/26/UQKDIFTVSZBWZIH7CMYIWERSBM/|뉴시스(《조선일보》에서 재인용)]]]}}}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돈덕전 현판.png|width=100%]]}}} || || {{{#683235 '''돈덕전 현판'''}}} || [목차] [clearfix] == 개요 == [[덕수궁]]의 건물. [[덕수궁 석조전|석조전]]의 뒤에 있다. 덕수궁은 근대에 지은 황궁이니만큼 서양식 건물, 양관(洋館)이 여러 채 있었다. 돈덕전도 그 중 하나이다. [[러시아 제국]]의 건축가 아파나시 이바노비치 세레딘사바틴이 설계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 이름 == '돈덕(惇德)' 뜻은 ‘덕(德) 있는 이를 도탑게(惇) 하여 어진 이를 믿는다”이다. 《[[상서|서경(書經)]]》의〈순전(舜典)〉에서 유래했다.[[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돈덕전(惇德殿)|#]] [[현판]] 글씨는 [[당나라]] 명필 구양순(歐陽詢)의 글자를 모아서 만들었다.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보관 중이다.[* 복원하면서 새로 걸린 현판은 원본을 복제한 복제품이다.] == 역사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900년대 돈덕전.png|width=100%]]}}} || || {{{#683235 '''1900년대 돈덕전. 멀리 보이는 뾰쪽한 탑이 돈덕전이다.[br]덕수궁 주요부 영역에서 벗어나있는 모습이다.[* 사실 이 사진은 돈덕전을 찍은 것이 아니라 [[주한미국공사관|미국공사관]] 진입도로를 촬영한 것이다. 지난 2006년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전시한 [[독일인]] [[장교]] 헤르만 산더(Hermann Sander)의 기증사진전 도록에 실렸다.]'''}}} || 처음에는 [[경운궁]](덕수궁의 옛 이름) 영역이 아니었다. 원래 이 자리에는 [[대한제국]] 정부의 총세무사였던 영국인 존 맥리비 브라운(J. M. Brown)[* [[석조전]]을 짓는데에 큰 역할을 한 사람이다.]이 관장하던 해관[* 海關. [[개화기|조선 말기]] 개항 후에 창설된 관세행정기구. 오늘날의 [[세관]].]의 [[한옥]] 청사가 있었다. 그러다 1901년([[광무]] 5년) 경에 경운궁으로 편입된 듯 하다. 그러나 [[월경지|궁내 주요부 영역과는 떨어져 있었다.]][* 오다 쇼고(小田 省吾)의 《덕수궁사》를 보면 '회극문(會極門)밖 즉 현재 영국 영사관의 서쪽에 해당하며 '''작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돈덕전의 구획이 있었다.''' 회극문과 더불어 집하문(緝門)은 곧 이 작은 길을 나서 동전(同殿)으로 통하는 문이었으나, '''나중에 [[덕수궁 석조전|석조전]]의 건축에 즈음하여 이 작은 길은 돈덕전 부지와 더불어 본 궁역내에 들어가''' 현재 보는 바와 같은 모습이 되었던 것이다.'라고 적혀있다.][* 오다 쇼고의 《덕수궁사》는 [[덕수궁]]을 연구할 때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오류도 많고, 일본인의 관점에서 쓴 것이기 때문에 비판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이후 기존의 해관 건물을 철거한 뒤 새로운 양관 공사를 시작했다. 이 새 양관이 바로 돈덕전이다. 돈덕전을 지은 이유는 1902년([[광무]] 6년) 10월에 있을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 칭경예식' 때문이었다. [[고종(대한제국)|고종]]은 이 예식을 통해 근대 국가 [[대한제국]]의 위용을 세계에 알리고 싶었다. 그 일환으로 각국의 [[외교관]]들을 초청해 대규모 행사를 계획했다. 바로 그 행사의 연회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돈덕전을 지은 것이다.[[https://blog.naver.com/minsu977/221277940175|#]][* 현재 [[경복궁 광화문|광화문]] [[교보문고]] 앞에 있는 칭경비전도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그러나 공사의 진척 속도가 많이 더뎠으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덕수궁 중명전|수옥헌]]이 불타자 한동안 공사가 중단되었다가 1902년([[광무]] 6년) 5월 경에야 다시 진행되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다. 이후 언제 완공했는지 알 수 없지만, 《[[황성신문]]》 1903년(광무 7년) 4월 6일 자 기사에 칭경예식 장소와 관련하여 돈덕전 언급이 있는 것을 보아 적어도 그 이전에 완공했고 이름도 지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https://blog.naver.com/minsu977/221277940175|#]] 여담으로, 1902년([[광무]] 6년) 10월에 치루었어야 할 칭경예식 행사를 1903년(광무 7년) 4월까지 언급한 것에서 알 수 있듯, 원래 계획한 날에 열지 못했다. 이후에도 여러 이유로 미뤘다가 결국 영원히 개최하지 못했다.(...) 1904년([[광무]] 8년) 4월에 일어난 [[덕수궁|경운궁]] 대화재 때 다른 주요 건물들은 불 타 사라졌지만 돈덕전은 무사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za_14104014_003|#]] 이후 돈덕전은 황실과 정부에서 [[덕수궁 중명전|수옥헌]]과 함께 주로 사용하는 건물이 되었다. 황제와 [[황태자]]가 각국의 [[공사]]와 [[사신(외교)|사절]]들을 만나고[[http://sillok.history.go.kr/id/kza_14202007_001|#]][[http://sillok.history.go.kr/id/kza_14205013_001|#]] [[잔치|연회]]도 열었으며, [[신하]]들을 접견하는 용도로 사용했다.[[http://db.itkc.or.kr/dir/item?itemId=ST#/dir/node?dataId=ITKC_ST_Z0_A42_07A_25A_00050|#]] 한 예로, 1906년(광무 10년)에는 [[순종(대한제국)|황태자 이척(순종)]]과 [[순정효황후|황태자비 윤씨(순정효황후)]]의 [[결혼|가례]] 때 연회장으로 사용했다. 외국의 국빈급 귀빈들이 묵는 일종의 영빈관으로도 활용되었다. 궁궐에 외국인 숙소가 있는 게 의외라고 생각할 수 있을텐데, 애당초 외국인과 교류하는 용도로 사용되었음을 생각하면 크게 의아할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대표적으로 1905년([[광무]] 9년) 방한한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딸 앨리스와 일본 황족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왕]] 등이 여기서 머물렀다. 1905년([[광무]] 9년) 11월 [[을사조약]] 이후에는 [[일본제국 경찰|일본 경관]]들이 머물며 [[덕수궁|경운궁]]을 감시하는 공간으로 사용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순종황제 즉위 엽서.png|width=10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순종황제 즉위 엽서2.png|width=100%]]}}} || ||<-2> {{{#683235 '''순종 황제 즉위 기념 엽서. 돈덕전의 사진이 실려있다.'''}}} || 1907년([[융희]] 원년) 8월에는 [[순종(대한제국)|순종]]이 이곳에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로 즉위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zb_10008024_001|#]] 순종은 이곳으로 이어하려 했지만, 계획대로 하지 못하고 대신 [[덕수궁 즉조당|즉조당]]으로 이어했으며 돈덕전은 신하들과 일본 관리들이 황제를 배알하러 오는 장소가 되었다. 그해 10월에 일본 요시히토 황태자(훗날 [[다이쇼 덴노]])가 방한했을 때에는 상견례와 회식을 하는 곳으로 활용되었고, 11월에 순종이 [[창덕궁]]으로 이어한 후에는 [[고종(대한제국)|고종]]이 외부인들을 접견하는 용도로 사용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910년 이후 돈덕전.png|width=10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돈덕전 옛 사진.png|width=100%]]}}} || ||<-2> {{{#683235 '''1910년 이후 돈덕전. 덕수궁 담장이 돈덕전 밖을 두르고 있다.'''}}} || 1910년에 [[덕수궁 석조전|석조전]]을 완공하고 서쪽 [[담|궁장]]을 확대하면서, 돈덕전은 비로소 [[덕수궁]][* 1907년([[융희]] 원년) [[순종(대한제국)|순종]]이 즉위한 후 [[태상황]] [[고종(대한제국)|고종]]이 사는 궁이란 뜻에서 [[경운궁]]의 이름이 덕수궁으로 바뀌었다.] 주요부 영역으로 들어왔다. [[일제강점기]]에도 [[이왕|이태왕]]으로 강등당한 [[고종(대한제국)|고종]]의 탄신연을 비롯하여 여러 행사가 열렸다. 1919년 고종 승하 후 덕수궁은 비었고, 돈덕전은 방치되었다. 그 후 없어졌는데 정확한 때는 모른다. 다만,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21072500209203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1-07-25&officeId=00020&pageNo=3&printNo=331&publishType=00020|1921년 7월 25일 자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저 때까지는 존재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1926년에 [[경성부]] 시내를 촬영한 항공사진을 보면 돈덕전이 보이지 않으므로 그 사이에 철거된 듯하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3100800209102016&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33-10-08&officeId=00020&pageNo=2&printNo=4606&publishType=00010|1933년 10월 8일자 《동아일보》의 기사]]를 보면 ‘최근에 돈덕전이 헐려버렸다’고 나오는데 그 최근이 언제인지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저 기사에서는 1933년 이전에 철거했다는 사실만 유추할 수 있다.] 1930년대에는 돈덕전 터에 아동 유원지가 들어섰으며, [[8.15 광복]] 이후에는 덕수궁관리소와 강당이 세워졌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돈덕전 복원 조감도.png|width=100%]]}}} || || {{{#683235 '''돈덕전 복원 조감도'''}}} || [[문화재청]]은 2017년까지 돈덕전 [[복원]]을 위한 발굴조사를 실시했고, 2018년부터 설계 및 복원 공사를 시작하여 2021년 완공할 예정이었으나 [[코로나 19]]로 인해 1년 연장되어 2022년 8월 말에 완공될 예정이었다가 12월 말로 연장되었다가 또 2023년 하반기로 연장되었다. 비용 때문인지 몰라도 원래의 석조가 아닌 철골로 공사 중이다. 사실 내부 구조가 평면도 하나 말고는 알려진 것이 없기 때문에 훗날 더 자세한 설계도라도 발굴된다면 내부를 수정할 수 있게 이런 방식을 채택한 것으로 보인다. 석조가 내부 무게를 지탱하는 방식이면 아예 건물을 다시 해체한 후 쌓아올려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복원은 제대로 된 복원이 아니다보니 논란은 있다. 따라서 '복원'이 아니라, '재현'으로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는 의견도 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설날때 직접 찍어놓은거.jpg|width=100%]]}}} || || {{{#683235 '''2023년 1월 23일에 촬영된 돈덕전 외관'''}}} || 2022년 12월 ~ 2023년 1월에는 외관이 완성되었다. 복원 조감도와 다르게 창틀의 색이 녹색이다.[* [[덕수궁 정관헌|정관헌]]의 창틀과 유사성이 있다고 판단해서 창틀을 녹색으로 지은듯하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EOq7mS22dLo)]}}} || || {{{#683235 '''돈덕전 개방을 다룬 〈연합뉴스〉의 보도 영상'''}}} || 5년 간의 공사 끝에 2023년 9월 26일 일반에 개방되었다. 지하층은 창고, 1, 2층은 [[대한제국]] 관련 자료관, 2층 일부는 아카이브실, 3층은 관리사무소로 활용한다.[[https://www.yna.co.kr/view/AKR20180130073651005?input=1179m|#]] == 구조 == === 외부 === * 돈덕전 외관은 붉은 벽돌과 회색 벽돌로 만들었으며, 벽돌 쌓기 양식은 [[덕수궁 중명전|중명전]], [[덕수궁 구성헌|구성헌]]과 동일하다. 하지만 현재까지 남은 중명전과 달리 붉은 벽돌은 창문 사이의 벽에만 쌓고, 주로 회색 벽돌의 비율이 높았다. * [[문화재청]]에서 2016년에 제작한 《덕수궁 돈덕전 복원 조사 연구》에 따르면, 길이 약 127척, 폭 95척, 건평 약 350평, 연 700평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함석지붕으로 앞뒤에 서로 크기가 다른 튜렛[* 작은 탑 모양의 부속 건물.] 3개를 세워 [[르네상스]]와 [[고딕]] 양식을 절충한 형태를 띄게 했으며, 남면에는 1, 2층 모두 [[발코니]]에 [[아케이드]]를 장식했다고 추측하고 있다. === 내부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돈덕전 평면도.png|width=100%]]}}} || ||<-2> {{{#683235 '''용도가 적힌 돈덕전 평면도'''}}}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돈덕전 1층 평면도.png|width=10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돈덕전 2층 평면도.png|width=100%]]}}} || || {{{#683235 '''1층 평면도[* [[http://www.heritage.go.kr/heri/gungDetail/imgDetail.do?detail_code=21&gung_number=4&img_serial_number=12&imgGubun=2&language=|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683235 '''2층 평면도[* [[http://www.heritage.go.kr/heri/gungDetail/imgDetail.do?detail_code=21&gung_number=4&img_serial_number=13&imgGubun=2&language=|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돈덕전 내부의 모습은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없으나 각 실의 용도가 표기된 평면도가 있다. [[순종(대한제국)|순종황제]]의 즉위식 안내를 위해 작성한 것으로,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목수현 박사가 《법규유편(法規類編)》이란 책에서 발견했다.[[https://www.joongang.co.kr/article/5061219|#]] 군주가 착좌하는 어탑이 북쪽에서 남면하지 않고 동쪽에 있는 다소 특이한 구조.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돈덕전 내부.png|width=100%]]}}} || || {{{#683235 '''돈덕전 내부[* [[http://www.heritage.go.kr/heritage/heritage_pop/detailImgPop.jsp?gung_number=4&file_name=mode_general_21_01.jpg|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현재까지 유일하게 남아있는 돈덕전 내부의 사진이다. * 《조선병합사》에서 돈덕전 내부를 묘사한 기록이 있다. '100평 넓이의 홀에 대원주 6본이 서있으며, 대원주마다 금색 용 조각이 새겨져있고, 서벽과 창은 홍색 및 황색 금수로 치장해두었으며 옥좌, 탁자, 교자 등은 금색찬란했다.'고 적혀있다.[* 출처: 《덕수궁 돈덕전 복원 조사 연구》, 2016, 문화재청.] * 최근 연구에 따라 돈덕전 내부에 있던 가구들 중 일부는 현재 [[창덕궁 희정당]]과 [[대조전]]에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1920년 희정당 중개축 당시 돈덕전에서 가구들을 옮겨온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가구를 배치했던 방의 위치까지 자세하게 적혀있다고 한다.[[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531704|출처]] == 여담 == * [[순종(대한제국)|순종]]의 황제 즉위식 장소와 날짜가 각각 두 가지로 알려져 있다. 하나는 1907년([[융희]] 원년) 8월 27일 돈덕전이고 다른 하나는 1907년([[광무]] 11년)[* 1907년 8월 2일까지는 연호를 '[[광무]]'로, 8월 3일부터는 '[[융희]]'로 사용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zb_10008002_003|#]]] 7월 19일의 [[덕수궁 중화전|중화전]]이다. 그런데 중화전에서 거행한 것은 즉위식이 아니고, [[대리청정]]을 맡은 순종에게 진하(陳賀)하는 예식이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za_14407019_003|#]] 당시 [[고종(대한제국)|고종]]은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일본 제국|일제]]에게 퇴위 압박을 받고 있어서, 절충안으로 양위 대신 [[황태자]]였던 순종에게 대리청정하라고 명했다. 그래서 저 예식을 치룬 것. 그런데 일제는 이를 슬그머니 즉위식으로 포장하여 고종의 강제 퇴위를 기정 사실화 해버렸다. 그렇게 얼결에 순종은 황제에 올랐고 정식 즉위식을 같은 해 8월 27일 돈덕전에서 거행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zb_10008024_001|#]] * 돈덕전 건물이 얼마나 화려했던지 1908년([[융희]] 2년) 3월 29일에 일본인 목수 마츠우라 신사부로(松浦真三郞)와 타마쇼 테이타로(玉署貞太郞)가 담을 넘어 돈덕전을 보려다가 경찰서로 잡혀가는 일도 있었다.[* 출처: 1908년(융희 2년) 4월 1일 자 《대한매일신보》 기사.] === 오해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아관파천 오해.png|width=10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돈덕전 일본대포.png|width=100%]]}}} || ||<-2> {{{#683235 '''아관파천 당시 촬영한 것으로 오해받는 사진들'''}}} || 돈덕전에서 촬영한 이 사진들이 한때 여러 자료에 잘못 설명된 적이 있었다. 바로 '[[아관파천]] 당시에 [[주한러시아공사관|러시아 공사관]]에 있는 [[고종(대한제국)|고종]]을 대포를 끌고와 위협하는 [[일본군]]'의 모습으로 알려진 것. 그러나 시기, 장소, 상황 모두 다 사실과 다르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아관파천 오해3.png|width=100%]]}}} || || {{{#683235 '''위에 있는 왼쪽 사진의 사람 부분을 확대한 모습'''}}} || 촬영 시기가 [[아관파천]] 때가 아닌 이유를 살펴보자. 위에 있는 왼쪽 사진에서 사람 부분을 확대한 모습을 보면 한 어린이(하늘색 원)가 있다. 바로 [[영친왕]]이다. 영친왕은 [[대한제국]] 수립 후인 1897년([[광무]] 원년) 10월에 태어났기에 [[아관파천]] 당시에는 세상에 있지도 않았다. 이것만 봐도 절대 아관파천 때 모습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주한러시아공사관|러시아 공사관]]이 아닌 근거도 튼튼하다. 구 러시아 공사관의 사진을 보면, 현재까지 남아있는 탑을 제외하고 전부 1층이었다. 그런데 사진 속 건물은 2층이다. 그리고 높은 언덕 위에 있었기 때문에 저렇게 대포를 끌고 시위할 만한 평지도 주변에 없었다. 그러므로 확실히 아니다. [[2000년대]] 들어 오류가 밝혀진 후에는, [[아관파천]]과 관련된 설명은 많이 없어졌다. 그런데 또 한 동안 [[고종(대한제국)|고종]]의 강제퇴위 당시 [[일본군]]이 대포를 끌고 무력 시위하는 모습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것도 아니다. 이 사진의 정체는 훗날 초대 [[틀:역대 조선총독|조선총독]]을 지내는 [[데라우치 마사타케]] 당시 육군대신이 1907년([[광무]] 11년) 6월에 [[고종(대한제국)|고종황제]]에게 대포를 헌납하면서 대포의 사용법을 설명하는 모습을 담은 것이다. 이런 사실은 한국영상문화사(사장 박종수)가 해제, 번역과 함께 5일 '일제가 강점한 조선'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한 '한국병합' 관련 일본측 사진 자료집인 '일본의 조선'(日本之朝鮮)에서 드러났다.[[https://news.v.daum.net/v/20061105070114175?f=o|#]][* 기사에는 1906년으로 되어있으나, 데라우치의 방한을 언급한 당시의 [[관보]]나 신문, 그리고 그가 남긴 일기를 종합해보면 1907년이 맞다. [[일본]]에서 [[대한제국]], [[조선]]을 담은 사진들의 내용을 표기할 때 이런 오류가 많이 보인다. 한 예로, 1898년 치루어진 [[흥선대원군]]의 [[장례|장례식]] 사진 연도를 1899년이라고 소개했다.] 다만, 사진집을 감수한 이민원 동아역사연구소장은 “이를 통해 [[조선]]에 대한 [[일본]]의 무력 시위 효과도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고 언급했다. 이로써 저 사진에 대한 논란은 일단락되었다. 왜 앞서 말한 낭설들이 퍼졌는지는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_id=CP_THE001&cp_code=cp0710&index_id=cp07100206&content_id=cp071002060001&search_left_menu=3|그 이유에 대해 추론한 포스팅]]. [[분류:덕수궁]][[분류:근대건축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