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efd88f ''' {{{+2 더글러스 서크}}} ''' }}}[br]'''{{{#efd88f Douglas Sirk}}}''' || ||<-2>{{{#!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douglas_sirk_02.jpg|width=100%]]}}}|| || '''{{{#white 본명}}}''' ||Hans Detlef Sierck (한스 데틀레프 시에르크)|| || '''{{{#white 국적}}}''' ||[[독일]] [[파일:독일 국기.svg|width=28]]|| || '''{{{#white 출생}}}''' ||[[1897년]] [[4월 26일]] [[파일:독일 제국 국기.svg|width=28]] [[독일 제국]] [[함부르크]]|| || '''{{{#white 사망}}}''' ||[[1987년]] [[1월 14일]] [[파일:스위스 국기.svg|width=23]] [[스위스]] 루가노|| || '''{{{#white 학력}}}''' ||[[함부르크 대학교]]|| || '''{{{#white 직업}}}''' ||[[감독]]|| || '''{{{#white 영화 데뷔}}}''' ||1934년, 'Zwei Windhunde / Zwei Genies'|| [목차] [clearfix] == 개요 == >서크는 가장 다정한 영화들을 만들었다. 그 영화들은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을 경멸하지 않는 사람의 작품이다. >------ >-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독일에서 태어나 주로 미국에서 작품 활동을 한 영화 감독. 할리우드 멜로드라마의 거장으로 유명하다. == 생애 == 서크는 1897년[* 1900년생이라는 설도 있다.] [[함부르크]]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한스 데틀레프 시어크이다. 젊은 시절 서크는 [[뮌헨 대학교]]에서 수학했으며, 이 시기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에르빈 파노프스키]][* 도상학적 접근으로 유명한 독일 출신의 미술사가] 등과 같은 여러 유명 인사들의 강의를 들었다. 또한 연극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서크는 결과적으로 연극 분야에서 일하게 된다. 서크는 연극 연출자로 명성을 얻었으며, 이 시기 그는 셰익스피어나 몰리에르 등의 고전 명작 연극들을 주로 무대에 올렸다. 1934년에는 독일 표현주의의 산실이던 UFA 스튜디오에 입사하여 당대 독일의 대표적인 영화 감독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서크의 두 번째 아내는 유대계였고, 이 때문에 나치 독일에서 영화 생활을 한다는 것은 그에게 점차 어려워져만 갔다.[* 반면 서크의 첫 번째 아내는 열성적인 나치 지지자였다. 이 때문인지 서크는 전 부인을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 결국 서크는 1941년 미국으로 떠나게 된다. 미국에 도착한 후 그가 처음으로 만들게 된 영화는 반나치 선전영화인 <히틀러의 미치광이>였다. 40년대에, 서크는 주로 소규모의 누아르 영화, 멜로드라마 등을 감독했지만, 그다지 비평적, 대중적 주목을 받은 편은 아니었다. 그의 대중적인 성공은 50년대 초반, 테크니컬러를 이용한 일련의 멜로드라마를 통해 거두어졌다. 이 시기 서크는 주로 [[록 허드슨]]과 협업하였는데, 허드슨은 서크의 영화를 통해 할리우드의 대표적인 스타로 성장하였다. 이 시기 그의 작품들은 (주로 여성층을 중심으로 하여) 대부분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으며 [* 한국에서도 몇몇 영화들이 개봉해 인기를 끌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바람에 쓴 편지>는 도로시 말론에게 아카데미상을 안겨주는 등, 어느 정도의 비평적 관심을 거두기도 했다. 이와 같은 연이은 성공을 통해 서크는 할리우드에서 점차 작가적 자유를 얻기 시작한다. 서크는 1959년 [[라나 터너]] 주연의 <슬픔은 그대 가슴에>를 감독하였는데, 이 작품은 그 해 최고의 흥행작이 되었음은 물론이고, 어느 정도의 비평적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이 작품은 주제 측면에서, 인종 문제라는 첨예한 주제를 다룬 최초의 영화들 가운데 하나이며, 오늘날에도 서크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고는 한다. 그렇지만 서크는 이 작품을 자신의 최고의 작품이라고 선언하고는 은퇴한다. 할리우드에 대한 서크의 부정적 태도와 그의 건강 문제가 주된 이유였다. 은퇴 이후 서크는 스위스 루가노에서 은둔하며 살아간다. 당대에 [[자크 리베트]]나 앤드류 새리스 같은 소수의 비평가들에게 주목받긴 했지만, 넓은 비평적 관심을 끌어모으지 못했던 서크가 재조명받게 된 것은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와 다니엘 슈미트 같은 뉴 저먼 시네마의 구성원들이 그의 영향을 고백하면서부터였다. 이런 재조명 탓에 루가노에는 서크를 만나러 전 세계에서 사람이 몰려들었고, 서크 부부는 난데없이 북적한 노년 생활을 맞이하게 된다... 말년에 시력을 완전히 잃은 서크는 1987년 세상을 떠났다. == 기타 == * 당대에는 여성용 막장 드라마 감독이라 폄하받았지만, 오늘날에는 서크에 대한 다방면에서의 분석이 행해지고 있다. 많은 평론가들이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영향을 언급하는데, 인공적인 세트나 화려한 소품을 통해 소격 효과를 실현한다는 것이 주된 분석 가운데 하나이다.[* 실제로 서크는 브레히트의 영향을 고백하기도 하였다.] 또한 영화 속에서 드러나는 계층적 시각은 정치적 영화 감독이나 영화 평론가에게 영향을 주었고, [[퀴어 영화]]나 페미니즘 영화 비평계에서도 자주 언급되는 등, 현대 비평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감독 가운데 하나이다. 화려하면서도 냉소적인 태도로 사회 계급이나 소수자 문제를 다루는 멜로 드라마는 대체로 서크의 영향력이 강하다. *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와 다니엘 슈미트, [[마틴 스콜세지]], [[토드 헤인스]] 등의 영화 감독들이 서크의 영향을 고백한 바 있으며, 그 가운데서도 파스빈더와 헤인스는 <하늘이 허락한 모든 것>을 리메이크하여 각각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와 <[[파 프롬 헤븐]]>을 감독하기도 했다. [[셰이프 오브 워터]]도 서크 멜로드라마의 오마주에 가깝다. * [[윌리엄 포크너]]는 자신의 소설을 영화화한 것 가운데서 서크의 <몰락한 천사들>을 제일 좋아했다고 한다. * [[한국전쟁]]에서 수백 명의 전쟁고아들을 탈출시켰던 [[딘 헤스]] [[공군]] [[대령]]의 실화를 [[록 허드슨]] 주연의 <전송가(Battle Hymn)>(1957)로 영화화하면서 25명의 실제 한국 [[고아]]들을 [[미국]]으로 데려와 출연시켰다. ||[[파일:battlehymn2.jpg|width=100%]]|| * 2019년 9월 모의평가에 더글러스 서크에 관한 지문이 출제되기도 했다. * 영화 감독 중에서는 드물게 2:1 화면비를 주로 쓴 감독이었다. 이후 [[아리 애스터]]가 2:1 화면비를 쓰고 있다. == 작품 목록 == 대표작만 나열했다. * <여름의 폭풍> (1944) * <파리의 스캔들> (1946) * <현혹된> (1947) * <쇼크프루프> (1949)[* 영화 감독 [[새뮤얼 풀러]]가 각본을 썼다.] * <마음의 등불> (1954) * <하늘이 허락한 모든 것> (1955) * <[[바람에 쓴 편지]]> (1956) * <빛바랜 천사> (1957) * <[[사랑할 때와 죽을 때]]> (1958)[*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였으며, 레마르크는 여기서 교수 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 <슬픔은 그대 가슴에> (1959) [[분류:독일 영화 감독]][[분류:1897년 출생]][[분류:1987년 사망]][[분류:미국 영화 감독]][[분류:함부르크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