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개요 == 대청관(大淸觀)은 [[노자|도덕천존]](道德天尊)을 모시고 천황, 태일 등 신에게 초제를 지낸 도관이다. 태청관(太淸觀)이라고도 한다. == 연혁 == [[고려]] [[충선왕]] 때 종9품의 판관이 의장용 깃발인 독기(纛旗)를 보관하는 일을 맡았다. [[공민왕]] 때는 [[홍건적의 난]]에서 쓰기 위해 독치(纛赤)를 두고 독기(纛旗)를 만들게 했는데, 폐단이 있어 1377년에 폐지됐다. 1392년에는 다시 종9품의 대청관 판관을 2명 두고 있다. 『[[태조실록]]』에서는 소격전만 남기고 태청관도 혁파했다고 했는데, 실제로는 혁파되지 않고 소격전과 함께 남았다. 『[[세종실록]]』에 인용된 대청관의 중창고기(重創古記)에 따르면, 대청관은 조선 국초에 [[문묘]] 오른편에 다시 세워졌다. 대청관 남쪽에는 무예를 연습하는 강무당(講武堂)을 뒀고, 제조관(提調官)·교학관(敎學官)이 있어 오군 녹사와 육위 참군에 진법을 교육했다. 1405년 [[예조]]에 속한 아문이 됐으며 녹사 2인이 속했다. 1416년부터 대청관에서 지내는 제사를 소격전으로 옮겨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그러다가 1421년 10월, 대청관을 수리해야 한다는 [[호조(조선)|호조]] 신하의 말에 [[세종(조선)|세종]]은 왜 대청관이 필요한지 옛 일을 상고해 설명하라고 말했다. 1422년 11월 예조는 문묘에서 초제를 지내는 일은 없고 소격전에서 지내며, 태청관을 옛 도읍에 둘 이유는 더더욱 없다고 해 개경의 태청관은 폐지됐다. 1444년에 개경부 대청관은 허물어진 채로 방치돼 신주만이 덜렁 남아있게 됐다. == 제례 == 『태종실록』에서 겸 지예조사 김첨의 상서에 대청관에서 행하는 제례가 명확하게 서술돼 있다. 대청관에서 행하는 초제는 나라에 액운이나 재앙이 닥쳤을 때 지내는 별초(別醮)의 성격을 띤다. 장수들이 명을 받아 나갈 때에는 대청관에서 재숙(齋宿)하고 마제(禡祭)를 지내는데, 이 역시 병사들 사이에서 도는 병을 막고 나라의 방비를 기원하는 행사이다. 김첨은 당시 대청관에서 연말과 연초에만 초제를 지내고 재변이 일어났을 때는 기도하지 않으며, 사관(祠官)에는 내감(內監) 한 명만이 있음을 문제삼았다. == 같이 보기 == * [[복원궁]] * [[소격서]] * [[정사색]] [각주][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복원궁, version=14, paragraph=3.1)] [[분류:도관]][[분류:고려의 통치 기구]][[분류:조선의 통치 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