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안창호)] [목차] [[파일:대성학교.png]] == 개요 == 도산 [[안창호]]와 [[윤치호]]가 [[평양시|평양]]에 세운 교육기관으로 [[신민회]]의 주요 사업 중 하나였다. [[대한제국]] 말기인 [[1908년]] 9월부터 [[일제강점기]] 초기인 [[1912년]] 조선총독부 학무국에 의해 강제 폐교될 때까지 존재한 교육기관이다. 1909년 일장기 불게운동, [[105인 사건]] 에 발이 묶여 [[안창호]]는 망명을 가게 되었고, [[일본제국|일제]]의 눈초리를 받은 대성 학교도 19명의 졸업생을 남긴 채 [[조선총독부]] 학무국에 의해 역사속으로 사라진다. == 이념 == 인재 양성을 통한 교육 구국(敎育救國)의 이념 아래, 교육 방침을 ① 건전한 인격의 함양, ② 애국정신이 투철한 민족운동가 양성, ③ 실력을 구비한 인재의 양성, ④ 건강한 체력의 훈련 등에 두었다. == 설립 계기 == 평양의 김진후(金鎭厚), 선천의 오치은(吳致殷), 철산의 오희원 등의 재정적 원조로 설립하였으며, 개교 때의 입학생은 90여 명이었다. 안창호는 자아혁신과 자기개조를 통하여 민족혁신과 민족개조를 이룩하려는 목적으로, 처음에는 전국의 각 도에 1개교씩 세워 그 출신으로 각 군·면의 초등학교를 지도하고자 하였으나 실현되지 못하였다. 대성학교는 민족사학으로서 크게 환영을 받아 입학 지원자가 500∼600여 명이 되는 때도 있었다. == 주요 인사 == 교장 : [[윤치호]] 대변 교장 : [[안창호]] [* 실질적인 교장 역할은 안창호가 했다고..] 교무 책임 : 장응진 === 교사 === 교장에 윤치호(尹致昊), 대변교장에 안창호, 교무 책임에 장응진(張應震), 교사에 차이석(車利錫)·김두화(金斗和)·나일봉(羅一鳳)·장기영(張基永)·문일평(文一平)·황의돈(黃義敦)·최예항(崔叡恒)·유기열(柳祈烈)·김현식(金鉉式)·유진영(劉鎭永)·김진초(金鎭初)·[[이상재]](李相在), 홍현주(洪顯周), 체조교사에 정인목(鄭仁穆)·이승설(李昇卨) 등이 근무하였다. 1910년부터는 장응진을 소장으로 한 하기 사범강습소를 부설하여 교사들의 재교육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당시 대성학교 학생이던 김형식(金瀅植)의 글에 의하면, 대성학교는 설립과 동시에 전국적인 성원과 지지를 얻었다. == 교육 과정 == 중등학교 과정이었으나 수학을 중심으로 한 4학년 과정은 전문학교 정도와 대등하였고, 학교 설비도 중등학교로는 드물게 완비하였다고 한다. 특히 안창호는 ‘주인정신’을 교훈으로 삼아 독립정신 및 책임정신과 주체적 정신을 강조하고, 무실역행(務實力行)과 성실한 생활을 인격 양성의 기본철학으로 제시하였다. 또한, 나라를 구하는 데 힘이 필요하므로 군사관(軍事官) 정인목을 체육교사로 초빙하여, 체육시간에는 군대식 훈련을 강행하였다. == 평가 및 의의 == === 당시 === 대성 학교 개교 당시 김형식 이라는 학생의 글에 따르면, 당시 대성 학교가 전국적 지지를 받았다고 하며, 지원자가 수백명 가까이 되었다고 한다. === 의의 === [[이승훈(1864)|이승훈]]이 세운 [[오산고등학교(서울)|오산학교]]와 함께 [[평안도]] 지방 교육구국, 계몽운동을 앞장선 [[대한제국]]기 중등교육기관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후 이 학교의 정신을 [[대성고등학교(강원)]], [[대성고등학교(서울)]] 이 이어받았다. [[분류:안창호]][[분류:대한제국의 학교]][[분류:일제강점기의 교육]][[분류:1908년 개교]][[분류:1912년 폐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