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한국의 절]][[분류:고려]] [include(틀:고려의 왕립 사찰)] ---- [목차] [clearfix] == 개요 == 大奉恩寺 [[고려]]왕조 개경 개성부 [[만월대]] [[황성]] 부근, 현 경기도 개성시 태평동 부근에 위치했던 사찰. 절의 풀 네임은 '대봉은사'이다. 제4대 군주 [[광종(고려)|광종]]이 재위 2년 차에 지은 사찰이다. [[황성]][* 옛 발어참성으로 광종 당시엔 [[나성]].]의 남쪽에 지어졌으며 [[왕건|태조]]의 원찰로 지어졌다. 절의 명칭은 '은혜를 받드는 사찰'인데 은혜는 광종의 아버지 태조의 덕을 지칭하는 것이다. == 효사관 == 봉은사엔 효사관(孝思觀)이란 건물이 있는데 바로 태조의 어진을 봉안한 곳이다. 고려의 태조 진전은 여러 군데 있지만 서경의 성용전, 개경 궁궐 내의 경령전(景靈殿), 궁궐 밖의 효사관이 매우 중시되었다. 여말 [[공민왕]]이 효사관을 경명전(景命殿)으로 개칭했었다. 경명(景命)은 [[천명]](天命)의 다른 말인데 경령전과 景자 운을 맞추고자 바꾼 듯하다. == 효사관 참배 == === 연등회 === 봉은사 효사관은 고려 왕실이 중시한 장소로 양대 불교 행사 중 하나인 [[연등회]]가 열리면 치황의(梔黃衣)를 입은 국왕은 효사관에 가서 태조를 참배해야 했다. [[고려사]] 예지 상원연등회의에 따르면 국왕은 [[만월대|본궐]] 중광전[* 만월대에서 가장 크게 활용된 편전.]→ 향복문[* 중광전의 대문.] → 태정문 → 승평문[* 궁궐의 남대문이자 정문.] 루트로 궁궐을 나와 봉은사 조진(祖眞)[* 고려사 원문 기록. 태'조' '진'전의 줄임말로 효사관을 지칭하는 것이다.]으로 향한다. 중광전에서 자황포(赭黃袍)[* 황금색 [[곤룡포]].]로 갈아 입은 국왕은 가마를 타고 궁궐을 내려 간다. 봉은사에 도착하면 태자와 공후백(公侯伯)[* 고려시대에 고위 왕족들을 지칭하는 말. 고위왕족들은 [[공작(작위)|공작]], [[후작]], [[백작]] 삼등작에 봉해지기 때문에 공후백으로 통칭했다.]들이 먼저 들어가 좌우로 선 채 국왕이 가마에서 내려 들어오는 것을 기다린다. 효사관에 들어간 국왕은 절을 하고 술잔을 올린다. 복잡한 제사 절차가 끝나면 다시 왔던 루트대로 다시 중광전으로 돌아간다. ==== 봉은행향 ==== 고려시대의 저서 《[[보한집]]》 권상엔 등석(燈夕)이란 행사가 기록되어 있다. 등석은 매해 2월 보름(15일)을 가리키는데, 고려국왕은 등석 전날 꼭 봉은사에 가 조성진(祖聖眞)[* 조성은 태조의 별칭이고 진은 어진을 줄인 것이다. 즉 조성진은 태조 어진을 의미한다.]을 참배했다고 한다. 이 의례를 봉은행향(奉恩行香)이라 불렀다고 한다. 궁궐에서 봉은사까지의 길엔 병사들이 쫙 늘어서 있고 오색 천과 등불로 화려하게 치장했다고 한다. 고려국왕이 봉은사를 갔다가 다시 돌아오면 승평문[* [[만월대]] 궁성 남대문이자 정문.]밖에서 국왕이 흥례문[* 고려는 천자국 예법에 따라 궁궐을 세워 [[황성]]부터 정전까지 총 5문이 있었다. 흥례문은 그 중 4번째 문이다.]에 도착할 때까지 환궁악을 연주했다고 한다. [[인종(고려)|인종]] 당시 [[척준경]]이 [[만월대]]를 불 태운 적이 있는데, 이 때 봉은행향이 중지되었다. 18년 후 재개됐는데, 인종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기념했다고 한다. >이 땅의 군신악이 / 此地君臣樂 >허투루 지나버린지 18년이다. / 虛經十八年 >여러 신료들 덕분에 / 幸因匡弼力 >전처럼 취할 수 있겠구나! / 旣醉復如前 >---- > - 《보한집》 권상 中. 인종 作. == 기타 == * [[현종(고려)|현종]]의 [[배향공신]]인 [[최사위]]의 묘지명엔 최사위가 봉은사 수축에 참여했단 기록이 있다. * 봉은사의 짝은 불일사(佛日寺)라고 할 수 있다. 광종이 아버지 태조 왕건을 위해 봉은사를, 어머니 [[신명순성왕태후]]를 위해 불일사를 세웠기 때문. [각주] ----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봉은사, version=241, paragraph=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