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조선의 행정구역)] ||<-3> '''{{{+1 {{{#f0ad73 대마주}}}}}}'''[br]{{{#f0ad73 '''對馬州'''}}} || ||<-3> {{{-2 {{{#000000 [[조선|{{{#000000 조선}}}]]의 속주 (1420~1592)}}}}}} || ||<-3> {{{-2 {{{#000000 조선의 대일외교거점 (1609~1869?)}}}}}} || ||<-3> {{{#!wiki style="margin: -6px -10px 0px" [[파일:조선 대마주 지도.png|width=100%]]}}}{{{#c10d0d '''⋯'''}}} {{{-1 세종 대의 쓰시마섬 정벌로}}}[br]{{{#c10d0d '''●'''}}} {{{-1 이즈하라(嚴原) 일대}}} || ||<-3> '''{{{#f0ad73 [[1420년|{{{#f0ad73 1420년}}}]] ~ [[1592년|{{{#f0ad73 1592년}}}]](1869년)}}}''' || ||<-2> '''{{{#f0ad73 성립 이전}}}''' || '''{{{#f0ad73 교류 단절 후}}}''' || ||<-2> '''[[무로마치 막부|{{{#000 무로마치 막부[br]{{{-2 (남북조시대)}}}}}}]]''' || '''[[에도 막부|{{{#000 에도 막부 (쓰시마-후추번)}}}]]''' || ||<-3><:>{{{#!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대동여지도 속 대마주.jpg|width=100%]]}}}[br]'''{{{-1 {{{#000,#fff ▲ 대동여지도에 나타난 대마주}}}}}}'''|| || '''{{{#f0ad73 이칭}}}''' ||<-2>방진(芳津) • 마대(馬臺) • 대양(對陽) || || '''{{{#f0ad73 관아 소재지}}}''' ||<-2>쓰시마섬 이즈하라정(嚴原町)[br]이즈하라히가시자토(嚴原東里)[br]→이즈하라니시자토(嚴原西里)[* 대화재로 인해 이전했다.] || || '''{{{#f0ad73 장}}}''' ||<-2>대마도주(對馬島主) || || '''{{{#f0ad73 대마도체찰사}}}''' ||<-2>[[이예]](李藝) || || '''{{{#f0ad73 하위 행정구역}}}''' ||<-2>8군 42포구 || || '''{{{#f0ad73 면적}}}''' ||<-2>708.25km² || || '''{{{#f0ad73 인구}}}''' ||<-2>불명 || || '''{{{#f0ad73 최후 대마도주}}}''' ||<-2>소 요시아키라(宗義達, 종의달)[* 요시아키로 읽기도 한다. [[1869년]] [[12월 13일]]에 [[조선왕조실록]]에서 기록한, [[폐번치현]]으로 [[나가사키현]]에 포함되어지기 전에 조선과 마지막 교류를 한 대마도주. 나중에는 소 시게마사(宗 重正)로 개명했다.] || || {{{#f0ad73 '''위치'''}}} || || [[파일:대마여지도.jpg|width=100%]] || || 1756년 제작, 대마여지도[* 1756년 6월 일본 지리학자인 모리고안이 에도 막부의 명을 받고 제작] || || [[파일:각국도-대마도.jpg|width=100%]] || || 각국도 || || || [목차] [clearfix] >'''"本隸新羅水路四百七十里在東萊府之東南海中至實聖王七年戊申倭置營於此島"''' >본예신라수로470리재동래부지동남해중지실성왕7년무신왜치영어차도 >(쓰시마섬은)본래 [[신라]]에 예속되어 있고 [[실성왕]] 7년까지 [[동래부]]에 속한 섬으로 470리 거리 동남쪽 바다에 있다. 무신년에 왜가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 >청구도 동래부 기장현 中 == 개요 == || [[파일:대마도 세이잔지.jpg|width=100%]] || [[파일:대마도 고려문.jpg|width=100%]] || || [[조선통신사]]가 묵었던 숙소인 세이잔사(西山寺) || 대마도주가 조선통신사를 맞이했던 고려문 || || [[파일:대마도 오후나에 선착장.jpg|width=100%]] || [[파일:조선통신사 행렬도 중 일부.jpg|width=100%]] || || 조선통신사 전용 선착장이었던 후나쓰키바(船着場)[* 지명이 아예 나루(津)란 뜻.] || 쓰시마섬에 행차한 조선통신사의 모습 || [[조선]] [[세종(조선)|세종]] 대에 [[대마도 정벌]]을 통해 복속된 [[쓰시마섬]]의 행정구역명으로, 조공 책봉 형태의 상징적 행정구역이다. 당시 대마도주는 조선과 일본 양쪽 모두에게 관직을 받았다.[* 이는 당시 쓰시마섬의 지정학적, 외교적 위치를 잘 나타내주는 사례 중 하나로, 쓰시마섬은 일본 막부의 세력권과 조선의 세력권 사이에서 두 국가 모두에게 속주로서의 지위를 부여받았거나 부여받기를 청했다.] 관아 소재지는 이즈하라정(嚴原町) 이즈하라히가시자토(嚴原東里)였다가 대화재로 이즈하라니시자토(嚴原西里)로 옮겼다. 이즈하라정은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주변의 작은 지자체와 함께 모두 쓰시마시(對馬市)로 통합되었으며 옛 이즈하라정의 구역에 쓰시마진흥국(對馬振興局)이 설치되었다.[* 지금의 호텔 쓰시마(ホテル対馬) 옆이자 토요코인 호텔 뒤에 위치한 이케신사(池神社)가 있는 위치로, 본래는 이곳에 대마도주의 관아가 있었다. 그런데 14대 대마도주 소 마사모리(宗將盛)에게 불만을 품은 그의 형제 소 모리하루(宗盛治)가 반란을 일으키는 중 관아에 불을 질러 이때 본래의 대마도주 관아는 완전히 불타버렸으며, 거기다 이즈하라정내까지 불이 옮겨 붙어버리면서 큰 화재가 일어났다. 이후 1669년에 가네이시강(金石川) 북쪽에 가네이시성(金石城)을 쌓고, 그곳으로 관아를 옮겼다.] == [[쓰시마섬/역사|역사]]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쓰시마섬/역사)] 본 문서에서는 대마주 관련 기록이 있는 '''15세기''' [[쓰시마섬]]의 역사에 대해 다루며, 이전 또는 이후의 쓰시마섬의 개괄적인 역사에 대해서는 [[쓰시마섬/역사]] 문서를 참조. >예조에서 계하기를, >"대마도의 도도웅와(都都熊瓦, 소 사다모리의 아명)의 부하 시응계도(時應界都)가 와서 웅와(熊瓦)의 말을 전달하기를, ‘대마도는 토지가 척박하고 생활이 곤란하오니, 바라옵건대, 섬 사람들을 가라산(加羅山) 등 섬에 보내어 주둔하게 하여, 밖에서 [[조선|귀국]]을 호위하며, 백성으로는 섬에 들어가서 안심하고 농업에 종사하게 하고, 그 땅에서 조세를 받아서 우리에게 나누어 주어 쓰게 하옵소서. 나는 일가 사람들이 수호하는 자리를 빼앗으려고 엿보는 것이 두려워 나갈 수가 없사오니, 만일 '''우리 섬으로 하여금 귀국 영토 안의 주·군(州郡)의 예에 따라 주(州)의 명칭을 정하여 주고, 인신(印信)을 주신다면 마땅히 신하의 도리를 지키어 시키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도두음곶[都豆音串]에 침입한 해적의 배 30척 중에서 싸우다가 없어진 것이 16척이며, 나머지 14척은 돌아왔습니다. 개중 7척은 곧 [[이키섬|일기주(一岐州)]]의 사람인데 벌써 그 본주로 돌아갔고, 7척은 곧 우리 섬의 사람인데 그 배 임자는 전쟁에서 죽고 다만 격인(格人)들만 돌아왔습니다. 이제 이미 각 배의 두목 되는 자 한 사람씩을 잡아들여 그 처자까지 잡아 가두고 그들의 집안 재산과 배를 몰수하고 명령을 기다리고 있사오니, 빨리 관원을 보내어 처리하시기를 바랍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 >《[[세종실록]]》 7권, 세종 2년 윤1월 10일 기묘 6번째기사 >'예조에서 대마도의 도도웅와가 귀속하기를 청한다고 아뢰다.' 쓰시마섬은 일본에서 [[율령제]]가 실시되었을 때 이미 일본에 [[속주]]로 편입되어 있었다.[* 그 전에 [[신라]]의 지배를 받았다는 기록도 청구도를 비롯해 여럿 있으나([[신라의 일본 침공 사례]] 문서 참조), 정작 [[삼국사기]]나 [[일본서기]] 같은 양국의 [[정사(역사)|정사]]에는 그런 내용이 실려있지 않다.] 적어도 7세기경부터는 확실히 한반도계 국가보다는 일본 열도의 세력이 쓰시마섬을 지배하게 된다. 그러나 이곳은 [[한반도]]의 여러 국가들과 일본이 외교사절단을 교환할 때 꼭 거쳐야 하는 중요한 지점이었으며, 중간 무역지점의 역할도 하였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그 중립성과 독립성을 어느 정도 보장해 주었다. 그러다 쓰시마섬은 세종 때 벌어진 [[대마도 정벌]]을 계기로 하여 대마도주가 조선의 신하가 되었다. 쓰시마섬은 당시 조선의 [[경상도]]에 속하게 돼 '대마주'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또한 세종 25년, 계속되는 밀항과 도항자를 막기 위해서 조선과 대마도주는 [[계해약조]]를 체결하게 되었다. 이 약조를 맺음으로써 쓰시마섬은 일본 및 조선 사이에서 안정적인 중개무역을 할 수 있게 되었으며, 덕분에 쓰시마섬의 호족이었던 소(宗)씨 가문은 쓰시마섬에 대한 지배를 강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 쓰시마섬은 [[삼포왜란]] 등으로 조선과의 관계가 어려워졌으며, 임진왜란을 기점으로는 사실상 조선의 종주권은 유명무실해졌다. 그 후로는 일본 메이지 정부가 [[폐번치현]]을 실시하면서 쓰시마 후추번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던 쓰시마섬은 완전히 [[나가사키현]]에 편입되었고 그 후 현재까지 일본의 영토로 남아 있다. 쓰시마섬은 [[정사 삼국지|삼국지 위지 왜인전]]에 의하면 3세기부터 [[왜인]]의 영역으로 분류되었고 늦어도 6세기에는 일본 본토의 정권에 귀속된 것으로 보인다. 가령 8세기 [[신라구]]의 쓰시마섬 공격을 방어할 때 일본 본토에서 부임한 장수 훈야노 요시토모(文室善友)가 이를 방어했다. 특히 '''철저한 중앙집권제 국가였던 [[조선]]에서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았다'''는 것은 쓰시마가 한국 땅이라 부를 만한 근거가 없다는 것을 방증한다. 이를 증명하는 가장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제주도]]. [[고려]]조까지만 해도 제주는 탐라성주가 별도로 다스리는 반독립지역 [[탐라국]]이었지만, 조선은 개국하자마자 쿨하게 '''탐라성주직을 폐지해버리고 제주도를 전라도에 편입시킨 뒤 제주목사를 파견했다.''' [[울릉도]]는 이미 고려시대부터 직접 관할하고 있었다. 11세기 [[도이의 입구]] 때문에 [[우산국]]이 쑥대밭이 되고 그 주민들이 육지부로 피난해 오면서 나라가 멸망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쓰시마섬 영유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조선이 쓰시마섬에 왜 정식으로 지방관을 파견하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답을 전혀 하지 못한다. 특히 쓰시마섬이 조선의 영토를 그린 고지도에 등장하고 대마도주가 조선에게 조공을 바치고 관직 책봉을 받았으니 한국땅이라는 논조는 역으로 조선은 명, 청의 조공국이었으니 한반도는 중국의 땅이라는 논리에 악용될 수 있다.[* 조선과 청 사이의 조공책봉 관계가 이전과 달리 강압성을 수반한 실질적 관계였다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으며, [[https://t1.daumcdn.net/cfile/blog/1376D60B4975E954D8?original|황여전람도]]와 같이 한반도가 청의 영토처럼 그려진 청대 지도도 존재한다. 조공책봉 관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조공]] 문서 참고.] 다음은 1421년 쓰시마 도주 [[소 사다모리]](宗貞盛)가 [[조선]]의 [[예조판서]]에게 보낸 글이다. 다만 이 글은 [[예조]]에서 내용이 공손하지 않다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 '''최공(崔公)이 금년 정월(1월)에 보낸 서계(書契)를 받자오니, ‘쓰시마섬이 [[경상도]]에 예속되었다.’ 했는데, 역사 서적을 조사하여 보고 노인들에게 물어보아도 사실 근거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세종(조선)|대왕]]께서 훌륭한 덕을 닦고 두터운 은혜를 베푸신다면, 누가 감히 귀의하지 않겠습니까. 옛날 [[제신|주(紂)]]가 무도한 까닭에 억조의 무리가 모두 창을 거꾸로 잡고 대항하였으며, [[성왕(주)|주공(周公)]]이 정치를 잘한 까닭에 월상씨(越裳氏)가 아홉 번이나 통역을 거쳐서 이르렀으니[* 월상씨는 과거 베트남, 라오스 일대에 살던 동남아시아 가문인데, 외국인이 언어의 장벽을 감수하면서까지 [[주나라]]에 귀화했음을 의미한다.], 반드시 옛날대로 일본 소속으로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그 덕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전체적으로 해석하면, 쓰시마섬이 경상도에 속해 있다는 것은 거짓이고, 본디 쓰시마섬은 애초에 조선의 영토가 아니다. 하지만 과거 중국사를 보면 폭군이 집권할 때에는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성군이 집권할 때에는 반대로 외국인이 귀화해 들어왔던 사례가 있으니, 세종이 하는 거 봐서 맘에 들면 과거 월상씨의 사례처럼 쓰시마섬이 일본에서 독립해서 조선에 복속해 줄 의사가 있으니 알아서 처신 잘 하라는 의미다.] >---- >[[http://sillok.history.go.kr/id/kda_10304006_003|세종실록 세종 3년(1421년) 4월 6일 무술 3번째 기사]] == [[쓰시마섬/한국의 영유권 주장|현대 한국의 영유권 주장 관련]]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쓰시마섬/한국의 영유권 주장)] == 관련 문서 == * [[쓰시마섬]] * [[나가사키현]] * [[쓰시마시(나가사키)]] * [[조선/행정구역]] [[분류:조선의 행정구역]][[분류:쓰시마시(나가사키)]][[분류:조일관계]][[분류:한일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