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대구 비산동 금귀걸이1.jpg]] [[http://1000bh.blog.me/90106613220|사진 출처 : 국립대구박물관(대구 수성구)-고대문화실-]] [목차] == 개요 == 1971년 [[대구시]]의 유물 조사 시행 결과 [[비산동(대구)|비산동]] 고분군 제37호분에서 발견된 5세기 중엽 [[신라]]시대 [[황금]] [[귀걸이]] 20여점. 현재 [[국립대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내용 == [[파일:대구 내당동 금귀걸이4.png]] [[경산 임당동 금귀걸이]], [[대구 내당동 금귀걸이]], [[의성 탑리 금귀걸이]]와 함께 전시된 모습.[[https://blog.naver.com/dgmuseum/220747057137|사진 출처 : 국립대구박물관 공식 블로그 - 대구 내당동, 경산 임당동, 대구 비산동, 의성 탑리 금귀걸이]] 1971년 출토된 [[대구광역시|대구]] 지역의 금귀걸이로, 비산동 고분군 제37-2호분에서 일괄 발견되었다. 유물의 제작 연대는 5세기 중엽(서기 400년대)이다. 비산동 고분군은 대구광역시 서구 내당동에 위치한 내당동 고분군(內唐洞 古墳群)의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으며, 총 87기의 5세기 중엽 신라시대 고분이 밀집해있는 곳이다. [[달성]]의 남단에서 남서로 뻗는 가지능선에 분포하는 제1군집의 28기(6~33호), 그 남동쪽에 작은 계곡을 두고 남서에서 북동으로 길게 뻗는 구릉에 존재하는 제2군집의 북서부 일부 16기(34~49호), 달성의 서편에 접해 있던 제3군집의 5기(1∼5호) 등 총 5개의 군집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현재까지 조사가 이루어진 고분은 [[일제강점기]] 때 한번 파헤친 34호와 37호분 단 2개 뿐이다. [[철기시대]]로부터 [[신라]]시대까지 대구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이 거주했던 곳이 지금의 비산동, 평리동 일대였다. 연구비 문제로 현재 조사가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지만 비산동에는 다양한 국보급 유물이 발견되고 있는데 1971년 12월 21일 [[대한민국의 국보|대한민국 국보]] 제137호로 지정된 ‘[[대구 비산동 출토동기류]](大邱飛山洞出土銅器類)’를 시작으로 그 외 부속 문화재로 ‘동검검경 및 동모부속구(국보 137-1)’, ‘광봉동모 및 검장(국보 137-2)’ 등이 국가 문화재로 지정된 상태다. 당시 비산동 37호분에서는 [[대구 비산동 출토 금동관]] 2점을 시작으로, 유리목걸이(琉璃頸飾)·금제굵은고리드리개(金製太環垂飾)·은제허리띠(銀製銙帶) 등의 장신구, 세잎고리자루큰칼(三葉環頭大刀)·세고리자루칼(三環頭刀)·쇠도끼(鐵斧)·쇠낫 등의 이기류, [[재갈]]·말띠드리개·말띠꾸미개(雲珠) 등의 마구류와 각종 토기류 등이 출토되었고, 제2돌덧널에서는 백화수피관모(白樺樹皮冠冒)·금동제조익형관식(金銅製鳥翼形冠飾)·금제가는고리귀고리(金製細環耳飾)·은제허리띠(銀製銙帶)·금동제신발(金銅製飾履) 등의 장신구, 세잎고리자루큰칼(三葉環頭大刀)·세고리자루칼(三環頭刀)·쇠도끼·쇠낫 등의 이기류, 말안장(鞍橋)·재갈·말띠드리개·발걸이 등의 각종 마구류와 각종 토기류 등이 출토되었다. 이렇게 비산동 37호분에서는 약 8천여점에 이르는 1,600여년 전 신라시대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고분군을 이루고 있는 총 87기의 무덤 중 단 한기에서 나온 유물이 이 정도라는 사실에 다들 놀랐고, 이로써 다른 고분에 소장되어 있을 유물들에 대한 관심이 더욱 높아지고 있지만 현재 다른 고분을 출토할 계획은 없는 상태다. 오직 [[신라]] 고분에서만 발견되는 정교한 황금 세공 기술을 보여주는 유물로, 5세기 경 [[대구광역시|대구]] 지역의 금세공기술 및 금속공예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여겨진다. [[분류:신라의 금제유물]] [[분류:국립대구박물관 소장품]] [[분류:대구광역시의 문화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