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송서)] ||<-2> '''서창위후(西昌威侯)[br]{{{+1 檀祗 | 단지}}}''' || || '''시호''' ||위(威) || || '''작위''' ||서창현후(西昌縣侯) || || '''성''' ||단(檀) || || '''이름''' ||지(祗) || || '''자''' ||공숙(恭叔) || || '''출신''' ||고평군(高平郡) 금향현(金鄕縣) || || '''생몰''' ||368년 ~ 418년 || [목차] [clearfix] == 개요 == [[동진]] 말의 장수로 자는 공숙(恭叔)이다. [[단소(유송)|단소]]의 동생이자 [[단도제]]의 형이다. == 생애 == 고평군(高平郡) 금향현(金鄕縣) 출신으로, 단지의 집안은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잃어서 형제들이 모두 당숙인 [[단빙지]] 밑에서 자랐다. 단지는 젊은 시절에 보국장군(輔國將軍) 손무종의 참군을 지냈고 손무종이 [[손은(동진)|손은]]을 정벌할 때 공을 세웠으며, 다시 용양장군(龍驤將軍) 왕탄의 참군이 되었다. 404년, 건무장군 유유가 환현을 토벌하고자 거병할 때 단지는 [[단소(유송)|단소]], [[단도제]]와 함께 유유에게 종군했고 유유의 참군사가 되었다. 나락(羅落)에서 단빙지가 전사하자, 단지는 단빙지 휘하의 군대를 계속 지휘했다. 환현이 평정된 뒤에는 진군부 참군이 되고 진무장군(振武將軍)이 더해졌으며, 유도규에게 소속되어 환현을 추격하며 연전연승했다. 405년, 단지는 유도규의 명으로 운수(溳水)와 면수(沔水) 일대로 달아난 환도아(桓道兒), 장정(張靖), 부사(苻嗣) 등을 토벌하여 평정했으며, 용양장군, 진군(秦郡) 태수, 북진류국(北陳留國) 내사로 제수되었다가 다시 영삭장군(寧朔將軍), 경릉군(竟陵郡) 태수가 되었으나 받지 않았다. 또한 장사(長沙)에서 환량(桓亮)을 물리치고 상동(湘東)에서 부굉(苻宏)을 물리쳤다. 무릉군(武陵郡) 내사 유열(庾悅)이 병에 걸리자, 단지는 유도규의 명으로 유열을 대신하여 무릉국 내사가 되었다. 이때 영삭장군이 더해지고 서창현후(西昌縣侯)에 봉해져 식읍 1000호를 받았다. 409년, 입조하여 중서시랑(中書侍郞)이 되었다. 410년, [[노순]]이 건강으로 침공하자, 보국장군이 더해져 서명문(西明門) 바깥에 주둔했다. 노순이 퇴각하자, 단지는 군대를 이끌고 강릉의 원군으로 출병했으나 도중에 병에 걸려 그만두었다. 412년, 우위장군(右衛將軍)으로 옮기고 보국장군, 선성군(宣城郡) 내사로 전출되었으며, 다시 도독강북회남제군사(都督江北淮南諸郡事), 청주(靑州) 자사, 광릉상(廣陵相)이 되고 정로장군(征虜將軍)으로 진호되었다. 414년, 사마국번(司馬國璠) 형제가 북서주(北徐州) 경계에서 수백 명의 무리를 모아 몰래 회수를 건너고 밤에 광릉을 습격했다. 단지는 이때 정강이가 화살에 맞았고 물러나서 부하들에게 오경을 알리는 북을 치게 했다. 단지의 부하들이 북을 치니 사마국번 형제는 새벽이 된 줄 알고 물러나 뿔뿔이 흩어졌고, 단지는 이 틈을 노려 백여 명을 죽였으나 이때의 일로 인해 건무장군으로 강등되었다. 415년, 우장군(右將軍)으로 진호되었다. 416년, 유유가 [[후진(오호십육국시대)|후진]]을 정벌할 때 사마씨[* 이름은 불명이다.]가 도중(涂中)으로 침공하여 진군(秦郡) 태수 유기(劉基)가 구원을 청하자, 단지는 군대를 나누어 이를 토벌했고 곧바로 사마씨를 참수했다. 418년, 유유가 송공(宋公)으로 책봉된 뒤 단지는 송국(宋國) 영군장군(領軍將軍)이 되었고 산기상시(散騎常侍)가 더해졌다. 단지는 유유의 공신이었으나 성품이 거만하고 방종하여 밖에서 방자하게 즐겼고 내부의 승진을 매우 불쾌하게 여겼다. 결국 병을 얻게 되자 단지는 치료를 포기했고, 그해에 광릉에서 사망했다. 사후 위(威)라는 시호를 받았다. [[분류:동진 및 오호십육국시대/인물]][[분류:368년 출생]][[분류:418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