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제17대 국회의원/비례대표)] ---- || '''{{{#000000 단병호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민주노총의 위원장)] ---- [include(틀:한국 진보진영 관련 문서)] ---- [include(틀:금속노조 역대 위원장)] ---- }}} || ---- ||<-2> '''{{{#000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br]{{{+1 단병호}}}[br]段炳浩 | Dan Pyeongho}}}'''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단병호 전 의원.png|width=100%]]}}} || ||<|2> '''출생''' ||[[1949년]] [[7월 13일]] ([age(1949-07-13)]세) || ||[[경상북도]] [[영일군]] 오천면 문덕동[* [[https://m.yeongnam.com/view.php?key=20040424.010080951480001|#]]][br](현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포항)|남구]] [[오천읍]] 문덕리) || || '''직업''' ||[[정치인]], 노동운동가 || || '''가족''' ||아내 이선애, 아들 1명, 딸 단정려[* 1983년생. 현직 검사(사법연수원 38기).] || || '''의원 선수''' ||'''1''' || || '''의원 대수''' ||'''[[제17대 국회의원|17]]''' || || '''정당''' ||[include(틀:정의당)] || [목차] [clearfix] == 개요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200311190500008_1.jpg|width=100%&height=100%]]}}} || || '''{{{#000 △ 단병호}}}''' || [[대한민국]]의 [[정치인]], 노동운동가이다. == 초기 생애 == [[1949년]] [[7월 13일]], [[경상북도]] [[영일군]] 오천면 문덕동(현 [[포항시]] [[남구(포항)|남구]] [[오천읍]] 문덕리)에서 태어나 2살 때 아버지를 병으로 여의고 홀어머니 아래에서 성장했다. 하지만 홀어머니도 곧 [[재혼]]을 하고 이부형제와의 갈등이 커지자 누나와 함께 조부모 밑에서 성장했다. 그는 노동운동가가 되기 전에는 스스로 보수적인 사람이었다고 생각했다. [[동지고등학교|동지상업고등학교]][* 참고로 제 17대 [[대한민국 대통령]] [[이명박]]이 졸업한 고등학교다.]를 중퇴한 후, 부모님과 함께 농사일을 하다가 1980년에 상경했다. == 노동운동가 시절 == [[20대]] 청년 시절 단병호는 [[민주공화당]]의 청년 당원이었으며, [[박정희]] 전 [[대한민국 대통령|대통령]]을 존경했다. 거기에다가 [[1980년]] [[5.18 민주화운동]]이 한창 일어날 당시에는 "광주 사람들 다 때려 죽여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전두환]] [[대한민국 대통령|대통령]]이 취임한 후 어린 시절의 친구로부터 진상을 전해 듣고 조금씩 생각이 바뀌었다고 한다.[* [[유시민]], [[이재명]], [[임종석]], [[장기표]]도 비슷한 일화를 가지고 있다.] [[1982년]] [[동아건설]] 창동공장[* [[도봉구]] [[창동역]] 인근, 지금의 동아아파트 자리에 있었다. [[서울 도시철도 4호선]] 개통 초기 창동역에서 [[창동차량사업소]]로 연결되는 인입선은 이 공장의 전용선을 일부 활용해 만들어진 것이다. 1990년대 중반 [[충청북도]] [[청주시]]로 이전했다.]에 입사했으며, [[1986년]] 연말 [[상여금]] 문제로 인해 처음으로 [[파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당시 그는 공장 주임이었는데 파업을 말리기는커녕 파업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사측의 퇴사 요구를 받았다. [[1987년]] 7월에는 이러한 문제 인식을 발전시켜 [[노동조합]]을 결성하였다. 이후 민주노조 운동이 가속화되면서 그는 [[1988년]] 지역업종 노동조합 전국회의 의장을 거쳐 <서울지역노동조합협의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990년]]에는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위원장(의장이라고 불리기도 한다)이 되어 [[국군보안사령부 민간인 사찰 폭로 사건|보안사령부의 민간인 사찰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전노협 결성 당시 한 번, 위원장직 수행 당시 2번 [[구속]]되기도 하였다. 전노협 위원장을 역임하던 [[1995년]]에는 아직 불법 상태였던 [[민주노총]]의 부위원장을 지냈고, [[1996년]]에는 <전국민주금속노동조합연맹 위원장>, [[1998년]]에는 <전국민주금속노동조합연맹>의 위원장을 지냈다. [[1998년]] 10월에는 [[1997년]]의 민주노총 총파업을 주도한 혐의 등으로 구속되었다. 징역 1년을 [[http://www.hani.co.kr/arti/legacy/legacy_general/L187353.html|선고받았으나]] [[1999년]] [[광복절 특사]]로 형 집행이 [[http://www.hani.co.kr/arti/legacy/legacy_general/L200094.html|정지되었다]]. 출소 직후인 [[1999년]] [[8월 29일]]에 [[민주노총]] 제3기 위원장에 당선되었다. [[2001년]] [[6월 15일]] [[민주노총]]은 정부의 노동정책에 항의하기 위해 파업을 벌였다. 그러자 다음날인 16일 정부는 단병호 민주노총 위원장 등 민주노총 지도부에 대한 수배령을 내렸다. 단병호 위원장은 [[명동성당]]에서 농성하다가 [[2001년]] 8월 경찰에 자진출두하며 다시 수감되었다. 단병호 위원장이 수감되자 해외의 노동단체들이 단병호 위원장의 석방을 요구하는 항의서한을 정부에 보냈다. 특히 [[국제노동기구]](ILO)는 결사의 자유가 잘 지켜지는지 확인하기 위해 조사단을 파견하기도 했다.[* 출처 [[http://www.hani.co.kr/arti/legacy/legacy_general/L400685.html|민주노총 왜 연대파업하나 /`노동정책 뒷걸음' 불만 폭발]] [[http://www.hani.co.kr/arti/legacy/legacy_general/L401103.html|지도부 검거령 촉각 / 민주노총-정부 정면충돌]] [[http://www.hani.co.kr/arti/legacy/legacy_general/L407068.html|노.정 대화창구 열리나 / 단병호위원장 자진출두.하반기 노동현안 해결 주목]] [[http://www.hani.co.kr/arti/legacy/legacy_general/L405816.html|민주노총 탄압말라 각국서 항의]] [[http://www.hani.co.kr/arti/legacy/legacy_general/L463181.html|단병호 위원장등 석방촉구 국제 노동자연대 동시집회]] [[http://www.hani.co.kr/arti/legacy/legacy_general/L26851.html|한국왔다간 국제노동기구 조사단장 타피올라 / '단병호위원장 석방위해 노력할것']]] [[2002년]] 2월 [[대한민국 검찰청|검찰]]은 단병호 위원장에게 징역 5년형을 구형했다. 그 때 [[서울지방검찰청]]에서 그를 구속한 인물이 '''[[황교안]]''' 당시 공안2부장 검사였다. 최종적으로는 법원으로부터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http://www.hani.co.kr/arti/legacy/legacy_general/L534998.html|기사]] [[2003년]] [[4월 3일]] 만기출소했다. [[http://www.hani.co.kr/arti/legacy/legacy_general/L490735.html|기사]] [[2003년]] [[4월 30일]] [[사면]] 및 [[복권]] 대상자에 포함되며 [[공민권]][*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회복했다. [[http://www.hani.co.kr/arti/legacy/legacy_general/L47218.html|기사]] == 정치 활동 == 이후 민주노총 활동 및 [[민주노동당]] 지지 활동을 하다가, [[2004년]] [[제17대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의 [[비례대표]]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러나 [[종북주의]] 파동 이후 민주노동당이 노동자 정치 세력화에 실패했다고 발언하면서, [[2008년]] [[3월 20일]]에 탈당하고 정계를 떠났다. 비슷한 시기에 탈당한 [[노회찬]]과 [[심상정]]과 달리 [[진보신당]]에는 입당하지 않고 노동자 대안 교육 센터 설립을 준비하는 등 정치와는 거리를 두며 활동하고 있다. 이후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정의당]]의 선거대책위원회 고문단으로 위촉되었다. [[20대 대선]] [[심상정]] [[정의당]] 대통령 경선 후보 후원회장으로 위촉되었다. == 여담 == [[노동운동]]계에서는 [[1990년]] [[전노협]] 창립때부터 지도부를 형성했던 [[문성현(정치인)|문성현]], [[심상정]]과 묶여서 소위 '''문/단/심 트리오'''로 유명했으며 이들은 [[민주노총]] 창립과 [[1996년]] 총파업때까지 전투적 노동운동을 주도했다. 이 세 명은 [[2000년]] 이후 [[민주노동당]]에 입당해서, 진보정치인으로 변신했으나 노선 차이로 뿔뿔이 흩어졌다. 문성현은 [[자주파]](NL계)의 지원으로 당 대표가 되었으나, 결국 [[바지사장]]에 그치면서 영향력을 상실했다. 심상정과 단병호는 NL계의 종북성을 비판하면서, 함께 탈당했으나 정치권에 남은 [[심상정]]과 달리, 단병호는 노동운동으로 복귀하였다. 재미있는 사실은 딸 단정려가 [[2006년]] 제48회 [[사법시험]]에 합격, [[사법연수원]] 38기로 수료하고 [[검사(법조인)|검사]]로 처음 발령받은 곳이 [[창원지방검찰청]]이었는데, 당시 창원지검의 [[검사(법조인)|검사]]장이 단병호를 구속시켰던 [[황교안]]이었다는 것. 게다가 아버지 단병호가 노동운동에 투신해 온 사람인데, [[창원시]] 역시 노사분규 관련 사건이 많은 곳이라는 점도 우연이다. 단정려가 검사가 된 직접적인 계기로 '구속과 수배를 반복하는 아버지가 뭘 그리 잘못한 것인지 내가 공부해서 알아보겠다'는 결심에서 비롯되었던 것. 그의 성씨인 [[단(성씨)|단]]은 [[희성|희귀성씨]]이며 [[2000년]]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 의하면 411가구 1,439명이 갖고 있다. == 선거 이력 ==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 {{{#000000 '''연도'''}}} || {{{#000000 '''선거 종류'''}}} || {{{#000000 '''선거구'''}}} || {{{#000000 '''소속 정당'''}}} || {{{#000000 '''득표수 (득표율)'''}}} || {{{#000000 '''당선 여부'''}}} || {{{#000000 '''비고'''}}} || || 2004 ||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 비례대표 || [include(틀:민주노동당)] || '''2,774,061 (13.3%)''' || '''당선 (2번)''' || '''초선'''[* 08.3.20 의원직 상실(민주노동당 탈당에 따른 자동상실)] || == 관련 문서 == * [[정치인/목록]] == 둘러보기 == [include(틀:민주노동당 제17대 국회 비례대표)] [각주] [[분류:대한민국의 남성 정치인]][[분류:대한민국의 사회운동가]][[분류:남구(포항) 출신 인물]][[분류:1949년 출생]][[분류:정의당 소속]][[분류:민주노동당 출신]][[분류:제17대 국회의원]][[분류:민주노동당 국회의원]][[분류:노동운동가]][[분류: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출신 인물]][[분류:사회운동가 출신 정치인]][[분류:동지고등학교 출신]][[분류:희귀성씨인 인물]][[분류:전국금속노동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