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이피로스 친왕국 군주)] ||<-2> '''{{{#white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4대 데스포티스[br]{{{+1 Νικηφόρος Α΄ Κομνηνός Δούκας | 니키포로스 1세 콤니노스 두카스 }}}}}}''' || || '''{{{#white 칭호}}}''' ||데스포티스 || || '''{{{#white 생몰년도}}}''' ||[[1240년]] ~ [[1297년]] || || '''{{{#white 재위기간}}}''' ||[[1266년]]/[[1268년]] ~ [[1297년]] || || '''{{{#white 제호}}}''' ||니키포로스 1세(Νικηφόρος Α΄) || || '''{{{#white 성}}}''' ||콤니노스 두카스 || || '''{{{#white 휘}}}''' ||니키포로스 콤니노스 두카스(Νικηφόρος Κομνηνός Δούκας) || || '''{{{#white 아버지}}}''' ||[[미하일 2세 콤니노스 두카스]] || || '''{{{#white 어머니}}}''' ||테오도라 페트랄리페나 || || '''{{{#white 배우자}}}''' ||마리아 바타치나[br]안나 팔레올로기나 칸타쿠지니 || || '''{{{#white 형제}}}''' ||안나 콤니니 두케나[br]엘레니 앙겔리나[br]디미트리오스 두카스 콤니노스 || || '''{{{#white 자녀}}}''' ||마리아 앙겔리나 콤니니 두케나[br]타마르 앙겔리나 콤니니[br]미하일 콤니노스 두카스[br][[토마스 1세 콤니노스 두카스]] || || '''{{{#white 종교}}}''' ||[[정교회]] || [목차] [clearfix] == 개요 ==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제4대 [[데스포티스]]. [[동로마 제국]]과 [[시칠리아 왕국]]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이어갔다. == 생애 == 이피로스 제3대 군주 [[미하일 2세 콤니노스 두카스]]와 테오도라 페르랄리파나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1249년 [[니케아 제국]] 황제 [[요안니스 3세]]의 손녀 마리아와 약혼하였고, [[1256년]] [[테살로니키]]에서 [[결혼]]했다. 그러나 마리아는 [[1258년]]에 [[사망]]했고 자식을 낳지 못했다. [[1259년]] 9월 부친이 펠라고니아 평원에서 [[시칠리아 왕국]]-[[아카이아 공국]]과 연합하여 [[미하일 8세]]에 대항할 때 참여했다. 그러나 [[펠라고니아 전투]]는 참패로 끝났고, 미하일 8세는 1259년 말 이피로스를 공략했다. 그는 적군을 피해 시칠리아로 망명했고, 거기서 병력을 지원받고 돌아와서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았다.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략한 미하일 8세와 계속 전쟁을 벌였으나, [[1264년]] 패배를 면치 못했다. 결국 미하일 2세는 미하일 8세의 우위를 인정하였고, 그는 미하일 8세의 조카 안나 칸타쿠지니와 결혼했다. 1267년 또는 [[1268년]] 부친이 사망한 뒤 이피로스 전제국의 [[데스포티스]]가 되었다. 반면 이복동생 요안니스 두카스는 테살리아를 물려받았다. 그 후 시칠리아 왕국의 군주이자 이피로스의 우군이었던 [[만프레디]]가 전사하고 앙주의 샤를이 [[카를루 1세]]로서 왕위에 오르자, 그는 이에 맞섰지만 [[1272년]] 디라키움을 잃었다. 1274년부터 미하일 8세가 시칠리아 왕국를 상대로 공세를 가하자, 카를루 1세는 이피로스와 손잡기로 했다. 그는 이에 동의하여 [[1276년]] [[테살리아]]의 요안니스 두카스, 시칠리아 왕국과 함께 동맹을 맺었다. [[1278년]] 3국 동맹군은 동로마 제국을 공격하여 부트린트를 포함한 여러 도시를 공략했다. [[1279년]] 카를루 1세의 봉신으로 들어가고 부트린트를 시칠리아 왕국에 내주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시칠리아군이 동로마군에게 패배했고, 알바니아에 있던 이피로스의 영토가 동로마 제국에게 잠식되었다. [[1282년]] 시칠리아 민중이 봉기하여 카를루 1세의 [[프랑스군]]이 학살당한 '시칠리아 만종 사건'이 발발하면서, 카를루 1세는 시칠리아를 잃어버렸다. 후원자가 힘을 잃자, 그는 동로마 제국에게 접근하였고, 아내 안나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내서 협상하게 하였다. 그 결과 이피로스는 동로마 제국의 봉신이 되었고, 그는 그 대가로 이피로스에서 무제한적인 통치권을 누릴 수 있었다. [[1284년]] 테살리아의 요안니스 두카스의 아들인 미하일을 이피로스로 유인하여 체포한 뒤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냈다. 이에 분노한 요안니스는 1285년 군대를 일으켜 아르타 주변 지역을 유린했다. 한편 딸 타마르를 [[안드로니코스 2세]]의 아들이자 공동 황제인 [[미하일 9세]]와 결혼시켜서 이피로스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황가를 통합하려 했지만, 미하일 9세가 [[아르메니아의 마리아]]를 택하면서 실패했다. 이피로스 내 반 동로마 성향의 귀족들은 그에게 나폴리 왕국의 카를루 2세와 협상하라고 설득했고, 그는 이에 설득되어 1291년 나폴리 왕국에 동맹을 제의해 긍정적인 답변을 얻어냈다. 이 소식을 접한 안드로니코스 2세는 이피로스에 군대를 보내 응징하려 했지만, 카를루 2세의 봉신인 케팔로니아의 리카르도 오르시니와 아카이아의 플로렌스 대공에 의해 저지되었다. 이피로스는 이제 나폴리 왕국과 손을 잡았고, 그는 딸 마리아를 리카르도 오르시니의 후계자와 결혼시켰으며, 다른 딸 타마르를 카를루 2세의 아들인 타란토의 필리포 1세와 결혼시켰다. 타마르와 필리포 1세의 결혼식은 1294년에 열렸고, 타마르의 지참금으로 [[아드리아 해]]의 해안 요새를 양도했다. 그러나 아드리해 해 연안의 그리스 주민들은 필리포 1세의 지배를 받기 싫어했고, 테살리아의 두카스 가문은 이를 틈타 필리포에게 넘어갔던 요새 대부분을 점거했다. 하지만 곧 나폴리 왕국이 개입해 요새를 되찾았고, [[1296년]] 나폴리와 테살리아는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니키포로스는 [[1297년]]경 사망했고, 아들 [[토마스 1세 콤니노스 두카스]]가 그 뒤를 이어 이피로스의 군주가 되었다. [[분류:이피로스 전제군주국 군주]][[분류:콤니노스 두카스 가문]][[분류:1297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