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히로요시.png]] '''니시자와 히로요시(西澤廣義 : 1920년 1월 27일~1944년 10월 26일)''' [목차] == 개요 == [[일본 해군]]의 [[전투조종사]]로, [[태평양 전쟁]]에서 [[연합군]] 항공기 120대를 격추시켰다고 전해지는 에이스 파일럿. == 누에를 치던 산골 소년 == [[1920년]] 1월 27일, 퇴역군인의 4남 1녀의 자식 가운데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 자란 고향은 [[나가노현]]의 카미미노치군 오가와촌(南小川村)로, 뒤로는 시로우마 산자락을 끼고 아래로는 [[시나노]] 강이 흐르는 산골 마을이었다. 그의 부모들은 농사를 짓는 한편 [[누에]]를 치는 양잠 일에 온 식구가 매달려 있었다. 니시자와 소년은 철도 들기 전부터 누에들에게 뽕잎을 먹이는 것을 배웠고 머리가 굵어진 후부터는 [[소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면 뽕잎을 따서 나르거나 견사를 뽑는 등 [[비단]]을 짜는 일 전반에 관해 배우며 식구들을 도왔다고 한다. [[1934년]] 3월에는 미나미오가와 소학교(南小川小学校) 고등과를 졸업한 니시자와 소년은 14살이 되었고, 4월에는 아버지의 권유와 연줄로 오카야에 있는 생사 공장에 취직하면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1934년의 지구촌은 겉보기로는 평화로와 보였지만, 유럽에서는 [[나치즘]]과 [[파시즘]]의 기세가 날로 커지고 있었고 일본 육군은 [[만주사변]]을 일으켜 일본 영토의 3배나 되는 [[만주]]를 집어삼켰고, 일본 해군도 길었던 해군 휴일의 침묵을 깨고 해군 조약을 휴지통에 던져넣을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그 무렵 일본 해군은 군축 조약에서 대수롭지 않게 취급되는 [[항공모함]]의 가능성을 탐구하면서 [[해군 항공대]]를 확충시킬 준비를 서서히 하고 있었다. [[비행정]]이나 수상기 정도를 함재기로 굴리던 일본 해군항공대는 전보다 훨씬 많은 비행기와 조종사가 필요해졌다. == 해군 입대와 조종사에 도전 == 니시자와가 16살이 되었을 때는 일본 해군은 조약의 일방적인 파기를 외치고 본격적으로 항모 기동부대를 창설하고 건함 경쟁과 함대 전력 확충에 나서고 있을 때였다. 저잣거리에는 해군 비행사를 모집하기 위한 [[포스터]]가 온통 나붙고 귓전에는 [[군함행진곡]]이 쾅쾅 울려퍼졌다. 니시자와가 다니던 공장 같은 노동자 밀집 구역에는 아예 해군 모병사관이 순회하면서 조종 연습생에 지원하라며 해군 입대를 독려했다.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니사자와는 눈부시게 흰 해군 정복을 입고 [[해군단검]]을 찬 모병사관이 부러웠고, 반복되는 지겨운 노동에서 벗어나 드넓은 하늘을 날고 싶어졌다. 5월에 해군 비행예과연습생 시험에 응시한 그는 1936년(쇼와 11 년) 6월 1일, [[요코스카]] 항공대(横須賀航空隊)에 을종 비행[[예과련]] 7기생(204 명)으로 합격하여 해군 4등 항공병이 되었다. 당시 일본 해군의 조종 훈련 과정은 길고 가혹하기 짝이 없었다. 2년 후인 1938년 8월 15일에 [[가스미가우라]] 항공대(霞ケ浦 海軍航空隊)에서 육상비행기반 71명 중에서 16등으로 교육을 수료한 그는 전투기 수료자 20명 중 하나로 선발되었다. 해군항공대의 체치기가 계속되는 동안 [[예과련]]으로 선발된 인원 10명 중에 1명만 전투기 승무원이 된 것이다. 일본 해군이 [[태평양 전쟁]] 서전에 보인 활약은 모두 이런 해군의 체치기를 통과해 고르고 골라 뽑은 인재들이었던 것이고, 니시자와 히로요시 일등수병 또한 그중에 하나였다. [[분류:에이스 파일럿]][[분류:제2차 세계 대전/군인]][[분류:1920년 출생]][[분류:1944년 사망]][[분류:오가와촌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