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대통령표창(독립유공자)]][[분류:북구(부산) 출신 인물]][[분류:1875년 출생]][[분류:1957년 사망]] || 성명 ||<(> 노원필(盧源弼) || || 생몰 ||<(> [[1875년]] [[6월 1일]] ~ [[1957년]] [[8월 16일]] || || [[출생지]] ||[[경상도]] [[부산광역시/역사|동래도호부]] 구포면[[http://library.bsbukgu.go.kr/html/06story/story/040305.php|#1]] 굿개[[http://library.bsbukgu.go.kr/html/06story/story/0501.php|#2]] [br](현 [[부산광역시]] [[북구(부산)|북구]] [[구포동(부산)|구포동]]) || || 사망지 ||<(> [[경상남도]] [[동래군]] || || 추서 ||<(> 대통령표창 ||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4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 생애 == 노원필은 1875년 6월 1일 경상도 동래도호부 구포면 굿개(현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29일 동래군 구포면 장날에 천여 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했다. 이에 일제 경찰은 김옥겸(金玉兼) 등 12명을 현장에서 체포하여 구포주재소(현재 구포제1치안센터 자리)에 가두었다. 그러자 노원필은 임봉래(林鳳來)·윤정은(尹正殷)·변봉엽(邊奉燁) 등과 함께 1,200여 명의 군중을 이끌고 구포주재소로 향했다. 이들은 구금된 동지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주재소 유리창을 부수고, 투석으로 대항했다. 이 일로 체포된 노원필은 1919년 7월 16일 부산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4개월,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동래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57년 8월 16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4년 노원필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강동원]]의 외할머니는 노원필의 장손녀다. [[https://star.mt.co.kr/stview.php?no=2017030610452357962&ERV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