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남북조시대/인물]][[분류:449년 사망]] [목차] == 개요 == 魯軌 (? ~ 449년) [[동진]], [[북위]]의 인물로 [[노종지]]의 아들이며, 다른 이름은 상치(象齒). 부풍군(扶風郡) 미현(郿縣) 출신. 아버지 노종지와 마찬가지로 본인의 열전은 없으나 『[[송서]]』와 『[[남사]]』에서 아들인 [[노상(유송)|노상]]의 열전을 통해 노궤의 행적을 간략히 소개하고 있다. == 생애 == 기마와 활쏘기를 잘 했고 기력이 남보다 뛰어났으며, 동진에서 경릉태수(竟陵太守)를 지냈다. 아버지 노종지는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웠지만 자신이 언젠가 유유에게 제거될 것이라는 두려움을 품고 있었다. 415년, 유유가 [[사마휴지]]를 토벌하고자 출정하자, 노종지는 결국 노궤와 함께 사마휴지를 돕고 유유를 막고자 하였다. 당시 강하상(江夏相) 유건지(劉虔之)가 군대를 이끌고 삼련(三連)에 주둔하며 다리를 세우고 식량을 모아서 [[단도제]]와의 합류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노궤는 유건지가 단도제와 합류하지 않은 틈을 노려서 유건지를 습격해 죽였다. 또한 파총(破塚)에서 [[서규지]]와 교전하여 이 전투에서 서규지, 왕윤지, 심연자가 전사하였다. 노궤는 다시 [[괴은]]을 공격했으나 괴은이 장병들을 독려하고 수비를 굳히며 움직이지 않자 결국 공격할 방도가 없어서 후퇴하였다. 이후 노궤는 사마문사와 함께 도합 4만의 군사들을 이끌고 유유군의 상륙을 저지하고자 했다. 그러나 [[호번]]의 상륙작전과 분투로 인해 노궤는 결국 석성(石城)으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이윽고 [[조륜지]]와 심림자가 석성을 공격하자, 노궤는 이들의 공격을 당해내지 못하고 결국 [[후진(오호십육국시대)|후진]]으로 망명했다. 416년, 노궤는 노종지와 함께 양양으로 출병했으나, 노종지는 도중에 병으로 죽었고 노궤는 조륜지에게 패배하였다. 417년, 유유가 후진을 정벌하여 멸한 뒤 노궤는 다시 [[북위]]로 달아났다. 노궤는 북위로부터 영남장군(寧南將軍), 형주자사(荊州刺史)로 임명되고 양양공(襄陽公)에 봉해졌으며, 장사(長社)에 진수하였다. 445년, [[송(남조)|유송]]의 무릉왕(武陵王) [[효무제(유송)|유준]]이 양양에 진수한 뒤 노궤는 측근 정정(程整)을 보내 귀순을 타진했다. 유송의 [[문제(유송)|문제]] 유의륭은 여러 차례 노궤에게 사신을 보내서 노궤를 사주자사(司州刺史)로 삼겠다고 약조했는데, 노궤는 [[유강조]]의 아버지인 유건지, 서담지의 아버지인 서규지를 죽인 일로 인해 자신이 추궁을 받을까 두려워하여 결국 남쪽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노궤는 449년에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