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FFFFFF '''{{{+1 남복이}}}'''[br]'''南福伊'''}}}}}} || || '''족보명''' ||남용성(南容聖) || || '''자''' ||화중(和仲) || || '''본관''' ||[[영양 남씨]][* 송정공파(松亭公派)-울진 정림(井林) 문중 16대손 용(容) 항렬. 영양 남씨 24세.] || ||<|2> '''출생''' ||[[1908년]] [[3월 6일]] || ||[[강원도]] 울진군 상군면 정림리[br](현 [[경상북도]] [[울진군]] 울진읍 정림리)[* [[영양 남씨]] 송정공파(松亭公派)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남석순]]·[[남원수]]·[[남왈성]]·[[남왈기]]도 이 마을 출신이다.] || ||<|2> '''사망''' ||[[1945년]] [[1월 11일]][* 남씨대동보 2권 대광공후 송정공파(영양 본관) 556쪽에는 11월 28일에 별세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 ||경상북도 [[대구광역시|대구부]] [[삼덕동(대구 중구)|삼립정]] 대구형무소[br](현 [[대구광역시]] [[중구(대구)|중구]] [[삼덕동(대구 중구)|삼덕동2가]]) || ||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남지학]]은 그의 7촌 조카, 즉 재종질(再從姪)이다. == 생애 == 남복이는 1908년 3월 6일 강원도 울진군 상군면 정림리(현 경상북도 울진군 울진읍 정림리)에서 아버지 남상백(南相百)과 어머니 [[장(성씨)|울진 장씨]] 장경익(張景翼)의 딸 사이의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출생 이후 큰아버지 남상일(南相一)에 입양되었다.[[http://uljin.grandculture.net/Contents?local=uljin&dataType=99&contents_id=GC01800678|#]] 그는 농업에 종사하던 중 1939년 10월 1일 [[남원수]], [[노하순]], [[주영석]], [[남정성]], [[전원강]] 등과 함께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뜻을 모으고 1939년 10월 28일 자신의 집에서 회합해 창유계(暢幽稧)를 조직했다. 창유계는 일제의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계형태를 가장하여 소규모 조직으로 운영되었으며, 일제의 [[중일전쟁]]이 장기화되면 반드시 일제가 불리한 처지에 놓이게 될 것을 예상하고 이를 이용해 독립을 쟁취하고자 했다. 남복이는 창유계를 조직한 후 다섯 차례에 걸쳐 회합을 가지면서 조직의 강화와 반일선전활동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1943년 3월 일제에 발각되어 조직이 와해되었고, 그는 경찰에 체포된 뒤 대구재판소에서 재판을 받고 징역 5년을 선고받은 후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45년 1월 11일에 옥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남복이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1990년에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울진군 출신 인물]][[분류:영양 남씨]][[분류:1908년 출생]][[분류:1945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국장]][[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분류:옥사한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