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조선의 별궁과 궁가)] ---- ||<-3> {{{#ffd700 '''{{{-1 조선의 별궁}}}[br]{{{+1 남별궁}}}[br]南別宮'''}}}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include(틀:지도,장소=웨스틴조선호텔, 너비=100%, 높이=100%)]}}} || ||<-2> '''위치''' || [[한성부]] 남서 호현방[br]{{{-1 ([[서울특별시]] [[중구(서울)|중구]] [[소공로]] 106[* 구 지번주소로는 [[중구(서울)|중구]] [[소공동]] 87-1.])}}} || ||<-2> '''설립시기''' || 1583년 || ||<-2> '''해체시기''' || 1897년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남별궁 조선호텔.jpg|width=100%]]}}} || ||<-2> {{{#gold '''현재 남별궁 터. 신세계조선호텔 자리이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남별궁 위치와 규모.jpg|width=10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남별궁 구성과 공관.jpg|width=100%]]}}} || || {{{#gold '''남별궁의 위치, 규모를 나타낸 도면'''}}} || {{{#gold '''남별궁의 구성공관 도면'''}}}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의 별궁. 원래는 [[태종(조선)|태종]]의 둘째딸 경정공주가 [[결혼]]한 뒤 살던 [[집|저택]][* 경정공주의 남편은 개국공신 [[조준(조선)|조준]]--조석 형이 아니다--의 아들 평양부원군 조대림이다.]으로 '소공주댁(小公主宅)'으로 불렸다. 현재 [[소공동]] [[이름]]은 이 '소공주댁'에서 유래했다. 그러나 공주 사후 자손들의 재산 분쟁으로 인해 경정공주의 집을 국가에서 환수했다. 1583년([[선조(조선)|선조]] 16년)에 선조는 이 집을 크게 수리한 뒤 셋째 아들 [[의안군]]에게 주었다. 그러나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왜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적장 [[우키타 히데이에]]가 1593년 4월까지 주둔하던 곳으로 쓰였다.[* 처음에는 [[종묘]]에 있었다가 안좋은 일들이 연달아 생겨 이 곳으로 진을 옮겨 조선군이 서울을 탈환할 때까지 머물렀다.] 서울을 되찾은 후 [[명나라군]]이 남쪽으로 내려왔을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이곳에 머물렀다. 1593년(선조 26년) 10월에 선조가 피란갔다 돌아온 이후 자주 이곳에 나가 명나라 장수와 [[관리|관원]]들을 접견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때부터 남쪽에 있는 [[궁|별궁]](왕이 때때로 머무는 장소), 즉 남별궁으로 불렸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왕]]들이 남별궁을 [[중국]] [[사신(외교)|사신]]을 만나는 장소로 사용했고, 남별궁은 국가외교의 중요한 시설로 관리받았다. [[정조(조선)|정조]] 때에는 빈객 접대와 연회 일을 맡아보는 관서인 예빈시(禮賓寺)를 남별궁 안으로 옮겨 설치했다. 또, [[청나라]] [[사신(외교)|사신]] 덕패(德沛)가 [[현판]]을 쓴 명설루(明雪樓)가 있었고, 이 현판에는 칙사들이 지은 [[시]]도 많이 새겨져 있었다. 뒤뜰에는 작은 [[정자(건축물)|정자]]를 만들어 풍류를 즐기게 했고 영험이 있다고 전하는 [[암석|돌]][[거북]]을 세워 사신단의 무사함을 빌었다. 또한 동네 어귀에는 아름드리 통나무의 두 [[기둥]]을 세운 큰 [[홍살문]]을 설치하기도 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Hwankudan.jpg|width=100%]]}}} || || {{{#gold '''남별궁 부지에 자리잡았던 원구단'''}}} || 1897년([[광무]] 원년)에 [[고종(대한제국)|고종]]이 [[대한제국]]을 수립하기로 하면서 기존의 [[사대]]를 상징하는 남별궁 자리에, 자주적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원구단]](圜丘壇)을 세웠다. [[중국]]과의 기존 관계를 청산한다는 의미였다. 원구단 완공 후 [[고종(대한제국)|고종]]은 이 곳에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이후 1913년에 [[일본 제국|일제]]가 원구단을 헐고 그 자리에 [[조선호텔]]을 건축했다. [[8.15 광복]] 이후에도 남아 [[웨스틴조선호텔]] - [[신세계조선호텔]]로 바뀌어서 오늘에 이른다. == 여담 == * [[미국인]] [[의사]]로 훗날 [[공사]]까지 지내는 [[호러스 뉴턴 알렌]]은 재동 [[제중원]][* 현재 [[헌법재판소]] 부근 자리.]의 2차 확장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886년([[고종(대한제국)|고종]] 23년) 8월에 외아문 독판서리 서상우를 통해 제중원을 남별궁으로 이전할 것을 요청했다. [[병원]]이 너무 좁고, 인구 중심지와 너무 멀며, 그리고 전혀 위생적이지 못해 중요한 [[수술]]들을 안전하게 못한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고종(대한제국)|고종]]은 이 요구만큼은 들어주지 않았다. 대신 구리개[* 현재 을지로 [[KEB외환은행]] 자리.] 쪽에 제중원 부지를 마련해 최대한 지원해주고 편의를 봐주었다. [[분류:조선의 별궁과 궁가]][[분류:조선 시대의 없어진 건축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