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게이머]] [include(틀:다른 뜻, from=NAI)] * 인공지능: [[Novel AI]] * NAI(네)는 [[그리스어]]로 예, 찬성이라는 뜻이다. 아니오, 반대는 OXI(오히). * 본격적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이 항목은 [[나무위키]]내의 [[유세미]], [[오사다 선인]] 항목과 [[http://yonggarri.ivyro.net/|이곳]]에 있는 자료들을 기준으로 작성하였음을 밝힙니다. ||[[파일:ZBL-NAI.png]] || [목차] == 개요 == [[일본]]의 [[슈팅 게임]] [[스코어러]]. 한자로는 '''内藤'''라고 표기, 항목명인 나이토는 内藤의 일본식 발음이다. 하이스코어 엔트리를 남길 때 사용하는 이니셜은 '''NAI'''. 사용하는 이니셜의 유사성 때문에 [[NAL]]과 동일 인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나이토와 NAL은 전혀 다른 인물이다. [[https://twitter.com/gkkrod765/status/1312744036248109058/photo/1|GKK-ROD가 공개한 자료]]([[https://archive.md/dsjmu|백업]])에 따르면 1980년에 소학교 1학년이라고 하며 1학년때 인베이데 게임에서 6만점을 달성했다고 한다. 이를 통해서 출생년도를 계산해보면 1973년(생일이 4월 1일 이후일때) 혹은 1974년생(생일이 4월 1일 이전일때) 둘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https://twitter.com/gkkrod765/status/1312753478008102912|그의 화려한 스코어러로서의 이력]]([[https://archive.md/Hy0SY|백업]]) GKK-ROD가 본인 트위터에서 푸는 썰들을 보면 그 정도면 당시 기준으로도 웬만한 스코어러는 전부 씹어먹고 다니는 수준이다. GKK-ROD 고등학생일 시절 아르바이트를 했을 시절 그가 아르바이트 하던 오락싫에선 [[그라디우스 3]]의 입고가 늦었는데, 이때 마침 우연히 놀러온 나이토에게 테스트 플레이를 의뢰하였는데 '''첫플레이만에 3-5 보스전까지 도달했다.''' 그리고 당시 이걸 하이스코어로 신청했다면 완전한 무결점이지만 정작 본인은 '''테스트 플레이라고 하면서 하이스코어 집계 신청 권유를 거절했다.''' 그라디우스3의 스코어 집계가 이뤄질 시기가 1990년까지인걸 생각해보면 압도적이다. [[https://twitter.com/gkkrod765/status/1264513750591082496|링크]], [[https://archive.ph/dDOoH|아카이브]] [[나왔다!! 트윈비]]에서 초회전일은 마사시의 2-5였지만 이미 그 시점에선 나이토는 2주 ALL은 달성했으며 연습에서도 최소한이 2-6 도달이었다. 집계마감일에 자전거로 본인이 주로 하던 오락실로 가서 플레이를 했으나 첫 플레이때부터 1-3을 진행하던 도중 지병인 발작이 도져서 플레이를 단념하였다. 돌아오던 때 GKK-ROD는 결과가 뽑힌 코시가야(越谷)에서의 기록을 신청하면 어떠냐고 권유하였지만 본인은 홈그라운드인 스가모(巣鴨)에서 기록을 찍는것에 집착하였다고 한다. [[https://twitter.com/gkkrod765|링크]], [[https://archive.ph/0kpnQ|아카이브]] 그리고 진보쵸에서 행해지던 바츠군SP의 로케테스트 현장에서 나이토가 바츠군SP를 플레이하자 제작사인 토아플랜이 플레이 소감을 물어보자 조금 어렵다고 하자 [[https://twitter.com/gkkrod765/status/1264537470051311617|정식 발매때 난이도가 하향되었다고]] ([[https://archive.ph/GQkH7|아카이브]]) GKK-ROD에 따르면 이보다는 더 강렬한 에피소드는 많으나 이를 오픈하는건 본인이 원치 않으나 GKK-ROD는 저 두가지 일화만큼은 나이토의 명예를 위해서 말하려고 했다고 한다. 따라서 이러한 에피소드들은 어디까지나 '''빙산의 일각'''이며 이는 GKK-ROD가 보유하고 있는 나이토의 영상 내역이 이를 잘 증명해주고 있다. 그리고 그 영상 목록마저도 어디까지나 '''일부에 불과하다''' == 행적 == 유세미가 슈팅게임에 입문하기 한참 전의 시절에 베지타[* [[2ch]] 슈팅판과 일본에선 슈팅신이란 평가를 받고 있는 모양. 국내에서 유명한 기록으로는 라이덴 1, 2 1000만점 오버가 있다.[* 여기서 GKK-ROD의 말에 따르면 [[https://twitter.com/gkkrod765/status/1402799437496217601|라이덴을 가동한지 2~3일만에 이미 1000만+α를 찍었고 실제로도 2개 점포에서 1000만+α를 찍는 플레이를 봤다]]고 하며 '''[[https://archive.ph/xRGjE|게메스트나 베마가에 스코어를 신청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타츠진오에서는 9달 동안 독주하던 이 사람의 기록을 나이토가 가는 등 맞대결을 펼치기도 했다. 다음달에 다시 베지타가 갈긴 했지만 두 달 후에 또다른 플레이어에게 기록이 갈리면서 이 게임에서 베지타의 시대는 완전히 막을 내리고 말았다(베이직 매거진 기준).], [[오사다 선인]] 등과 함께 슈팅게임의 신으로 이름을 떨친 플레이어다. 생긴 건 좀 통통하고 온화하게 생겼다.[* 그런데 이 사람도 인간은 인간인지 슈팅게임을 하면 '젠장' 을 외치며 빡친다고 한다. --역시 누구나 악마가 되는 슈팅게임--] 어찌 보면 지금의 [[유세미]]가 탄생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친 플레이어다. 이 사람이 세운 기록으로 인해서 유세미가 슈팅 게임에 입문하고 후일엔 유일한 STG의 신으로 이름을 떨치게 되는데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이다.[* (2001년 아르카디아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 유세미 曰) 「그러던 어느 날 아키하바라의 TRY tower에 있는 스코어 보드를 보게 되었는데 '''거기에 NAI씨의 2-5 하이 스코어가 올라가 있었습니다'''. 저는 ''''와, 저사람 진짜 대단한데? 나도 저런 스코어 한 번 내보고 싶다!'''' 라고 생각했고 '''그것이 발단이 되었습니다'''.」] 또 당대의 여러 슈퍼 플레이어들에게 존경하는 플레이어를 물으면 꽤나 자주 언급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BGR-44]]가 존경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하여간에 각설하고 이 사람의 슈팅과 관련된 행적으로는 [[돈파치]] 4400만 오버, 그리고 후술할 [[도돈파치]]에서의 7.19억(C타입 부문)독보적 행보 및 새턴판 스코어 어택 캠페인 우승[* 스코어는 506,797,380점이며 나머지 플레이어의 스코어가 2억이 안됐다는 점은 실로 [[충격과 공포]]. 상품으로 일명 청판 혹은 청벌이라 불리는 특별기판을 받았다(타이틀 화면이 붉은색 계통이 아닌 파란색 계통이다). 정식 명칭은 캠페인 버전.], [[타츠진오]] 4주 진출[* 위에서 언급한 나이토의 기록은 3-5까지 진출에 374만. 게메스트 쪽에서는 4-5 진출 기록이 확인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기록 달성 시기도 시기이거니와 저 기록들이 당시 전일 기준(다시 말해 더 나은 기록이라도 달성 당시 전일이 아닌 기록들은 알 수가 없다는 것)이고 무엇보다 이 사람의 실력을 볼 때 지금은 그 이상도 가능할 듯하다. 그리고 1000만은 보통 8주까지 가야 나오는 점수이며 8주까지 가기 전에 달성한 WTN도 7-4에서 달성했다(아쉽게도 09년에 낸 거라 7주차에서 돌파했다는 사실 말곤 의미가 없지만). 종전에 이 각주에 언급되어 있던 나이토의 영상은 2주. 고로 1000만은 단순히 나올 수 없는 수준을 넘어 택도 없는 구간. 참고로 최초 달성자인 SPK는 8-2(!!!)에서 달성했으며 당시 잔기는 2. SPK의 코멘트에 따르면 세번째 1000만 오버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전에도 1000만점을 달성한 적이 있는 듯.], [[배틀 가레가]] 가인부문 최종 1769만([[게메스트]] 1997년 4월호, 당시 전일), [[도돈파치]]에서 항상 독보적인 스코어를 기록함과 동시에 최초로 6, 7억 돌파, [[그라디우스 IV]]를 [[유세미]]보다 더 빨리 카운터 스톱을 2번이나 달성. 그리고 은퇴한 슈터 취급을 받던 2004년에 악마의 게임으로 통하던 [[하챠메챠 파이터]]의 카운터 스톱 등이 있다. '''인간이 아니다.''' 달인왕의 경우 실수로라도 미스가 나면 사실상 재기가 불가능해서 고수들조차도 실수로 미스가 나면 그 즉시 손을 놓는 게임으로 유명한데 '''이 사람은 미스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부활에 성공하는 등의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돈파치]] 4,400만 점은 2달 정도만 파서 달성한 기록이라고 한다. 이게 얼마나 대단하냐면 현재 돈파치의 국내 전일이 '''3,994만''' 점에 육박하는데 이게 약 2~3년에 걸쳐서 얻어낸 기록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자. 그런 대기록을 2달 정도만 파서 찍어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인간이 아니라 외계인의 범주에 들어가야 한다. 이 사람이 도중에 종료하지 않고 계속해서 [[돈파치]]를 팠을 경우 그 기록은 알아서 상상해 보자.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오사다 선인]]과의 맞대결이 제대로 이루어져 기록 경쟁도 훨씬 볼 만하게 이루어졌을 것이다.[* 사실 여기서도 맞대결 자체는 딱 한 번 이루어졌지만 선인의 경우 지리적 요건으로 인한 입하 시기의 문제가 있기 때문에 제대로 이뤄졌다곤 보기 어렵다. 일단 이 한 번의 대결에서는 나이토가 승리하였지만 계속 팠다면 어떻게 되었을 지 본인들도 장담 못 할 듯하다.] 이후 [[도돈파치]]에서도 독보적인 행보를 보이면서 당시 최초로 6억과 7억을 돌파하는 등 당시 도돈파치에서는 그 누구도 이 사람을 따라올 사람이 없었을 정도이다. 또한 도돈파치에서 최초로 6, 7억의 경지에 다다른 사람답게 [[히바치(돈파치 시리즈)|히바치]] 발악 노봄도 이 사람이 가장 먼저 달성하였다. 사실 1차 형태도 2루프째에는 모두 회피하는 데 성공했지만 봄이 없어 기합회피했는데 다행히도 잘 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잔봄0의 힘-- 참고로 도돈파치에서 처음으로 올클을 했을 시의 이 사람의 스코어는 3.24억(잔1, 1주 1.21억)이다. 공략 속도도 인간의 경지가 아닌데 하치 대면에는 1주일 정도만 걸렸으며 히바치 클리어는 '''20일''' 정도나 걸렸다. 물론 사전에 컨티뉴 플레이를 통해서 히바치의 공격들을 전부 조사하는 등 탑[[스코어러]]라는 명칭이 아깝지가 않다. 저런 노력들이 도돈파치에서 독보적인 스코어를 기록하도록 하는 원동력이 되지 않았을까. 어찌되었든 사실상 인간의 수준이라고 보기 힘든 공략 속도다. [[게메스트]]의 도돈파치의 공략 비디오의 제작에 이 사람이 참여하였는데 담당은 C타입이다[* A타입과 B타입은 오사다 선인이 담당했다. 스코어는 A타입 6.03억, B타입 4.77억. 자세한 건 오사다 선인 항목을 참조.] 이 사람의 영상은 '''C-S타입 6.38억'''(잔4, 2주 류코와 하치에서 1미스씩, 히바치 노미스, 발악 노봄) 영상이다. 이쯤 되면 할 말을 잃을 지경이지만 더욱이 놀라운 건 저게 '''10번 정도''' 플레이를 해서 나온 기록이라고 한다. 물론 수록 전에는 연습을 했다고 언급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단 10번만에 저게 나온다는 것 자체가 이미 인외의 경지라는 소리. 또 하나 놀라운 건 저 영상의 수록이 단 '''이틀''' 정도만 걸렸다는 점이다. --거봐, 외계인 맞네--[* 사실 이 양반은 도돈파치 7억 오버 기념으로 공략 비디오를 발매하였다. 이쪽은 소속 클랜인 SOF에서 판매'''했던''' 동인 비디오. 최초 돌파 시점의 플레이(7.02억)랑 C-S 7.10억 영상이 수록되었다. 오마케로 수록될 예정이던 1주 2.14억, 히바치 147히트 영상은 재생시간상의 문제로 WTN의 청판 비디오에 실리게 된다. 검은 막대기가 주기적으로 보이는 현상(옛날 모니터에선 제법 익숙할 그 막대기인 듯) 때문인지 후에 발매된 WTN의 청판 영상과는 달리 리핑된 영상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이쪽도 오마케는 리핑된 영상이 보이지 않는다. 아마 나이토의 영상이라 같은 현상이 나타나는 듯하다. 감상에 크게 방해가 될 수 있는 현상이 나타남에도 그대로 판매한 이유는 WTN의 영상을 찍을 때와 달리 그걸 교정할 장비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때 국내에서 이 7.1억 영상의 정체가 7.19억이 아니냐는 추측이 있었으나 어떤 분이 해당 비디오를 구입한 뒤 실물을 확인해본 결과 7.19억 영상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리고 1999년 2월, 최초로 도돈파치에서 7억을 돌파하였다(잔5). 그리고 얼마 후에 소속 클랜인 SOF에서 이 사람이 7억을 돌파한 기념으로 도돈파치의 공략 비디오를 발매하였다. 여담이지만 [[도돈파치]]를 종료할 당시 나이토가 찍은 스코어는 '''7.19억'''이다. 원래는 6.83억을 내고 종료하었으나 같은 클랜원인 WTN이 6.94억(기체는 C-S)을 내면서 갈아버리는 바람에 복귀해서 7.19억을 찍고 다시 종료.[* 1주 점수는 WTN보다 살짝 낮다.] 이후 현재 C타입 전일인 아게구모가 '''4년만에 ''' 이 기록을 갈았는데 도돈파치를 접었던것인지 복귀하지 않았다. [[도돈파치]]로 데뷔한 [[유세미]]를 졸지에 [[콩라인]]으로 만들어버린 일화도 유명하다. 실제로도 유세미가 3억을 내면 그는 4억을 냈고 유세미가 애써 4억을 내면 5억을 돌파하고, 5억을 내면 6억을 내는 이런 --기만질--악순환이 반복되었다.[* 유세미 曰 「계속 이런 식으로 가다보니 '''언제나 그의 뒤를 쫓아가는 격밖에 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결국 유세미가 최종으로 6,8억을 냈으나 이후 다시 7억을 내며 실패. 결국 유세미는 나이토를 제치지 못했다. 이렇게 반복되니 당시 신인이었던 유세미가 [[조홍|좌절감]]을 느낄 만하다. --'''[[조홍|좌절감이 사나이를 키우는 것이다!]]'''-- 당시 이 사람의 포스는 지금의 [[유세미]]를 생각하면 된다. 아니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유세미의 행적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려면 좋든 싫든 이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게 된다. 이 외에도 1988년경 그라디우스2에서 나이토라는 이름이 확인되고 있다. 이 사람이 가끔 스코어네임을 NAI라 적지 않고 코멘트 중간이나 뒤쪽에 나이토라고 적을 때도 있는데 그때와 스코어네임 형식에 유사성이 발견되며 한자와 거주지가 일치하는 걸로 봐서 동일인물인 듯하다. 참고로 이 당시의 나이토는 고등학생 시절이었다. 점수는 천만점을 달성하면서 해당 부문(총 3부문 8, 9, 12월) 집계 종료.[* 다른 부문에 비해 천만점 달성이 유별나게 빠른 건 아니다. 나머지 부문 중 두 개는 각각 8, 12월에 천만점을 달성했으며 남은 하나만 89년 3월에 달성. 그래도 두 부문 이상 최초 천만점 달성에 성공한 사람은 이 사람 뿐이라는 것에서 이 사람의 강렬한 포스를 느낄 수 있다. 그라2에서 칸스토를 달성할 당시의 나이토는 고등학생이었다고 한다.] 2004년에는 [[하챠메챠 파이터]] 카운터 스톱 달성이 확인되기도 했다. 2010년 5월엔 [[BGR-44]]의 오프모임에서 WTN과 함께 모습을 드러내었다. 하지만 타츠진오 영상을 상영한 WTN과 달리 영상 상영은 하지 않은 듯. 하이스코어러로서는 은퇴한건 사실이고 이때문에 슈팅게임도 접은것으로 알려져있으나 슈팅게임은 여전히 하고 있는 모양으로, GKK-ROD가 공개한 [[https://twitter.com/gkkrod765/status/1499742890787885059/photo/1|자료]]([[https://archive.ph/yDnI5|아카이브]])에 따르면 2012년작인 [[도돈파치 최대왕생]]을 플레이하여 오버플로우를 일으키는 영상까지 촬영한 것이 확인되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보이는 영상만 해도 GKK-ROD가 가지고 있는 영상의 '''일부'''에 해당한다. 이는 2012년작인 최대왕생에서도 오버플로우를 띄울 수 있는 폼을 가지고 있다는게 핵심으로 '''재활만 하면 하이스코어에 복귀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리고 그 스크린샷에서 보이는 '''미신청 전일리스트'''란 제목의 xls파일은 덤) 어떤 이가 동영상의 타이틀만 봐도 경악이지만 제일 아래에 있는 엑셀파일이 쩐다고 하자 GKK-ROD가 답변을 했는데 그 리스트는 여러모로 위험하기 때문에 공개할 수 없는 리스트라고 하며 나이토는 하이스코어판에서 발이 넓은데다 [[전일]]을 따는 것보단 인간관계를 중요시 하는 타입이기 때문에 성과를 뽑고서도 신청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어쨋든간에 50을 눈앞에 두고 있는 2022년 현재도 모습만 드러내지 않았을뿐 지금도 슈팅 게임을 플레이 하고 있는걸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