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대한민국의 시인]][[분류:1913년 출생]][[분류:1975년 사망]][[분류:김해 김씨 경파]][[분류:평양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장로회 신자]][[분류:숭실고등학교 출신]] [include(틀:다른 뜻1, other1=대한민국당 대표로 활동하는 정치인, rd1=김현승(정치인), other2=축구선수, rd2=김현승(축구선수), other3=YOUNITE의 멤버, rd3=현승)] [[]] |||| '''{{{+1 김현승}}} [br] 金顯承''' || ||||{{{#!wiki style="margin:-6px -10px" [[파일:Kim_hyunseung.jpg|width=100%]]}}}|| ||<|2> '''출생''' ||[[1913년]] [[4월 4일]] || ||[include(틀:국기, 국명=일본 제국, 출력=일제강점기)] [[평안남도]] [[평양]] || ||<|2> '''사망''' ||[[1975년]] [[4월 11일]] (향년 62세)|| ||[include(틀:국기, 국명=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관악구]] [[상도동(서울)|상도동]] [[숭전대학교]] 부총장 집무실[* [[고혈압]]으로 사망.] || || '''종교''' ||[[개신교]]([[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예장통합]])[* 매우 독실한 신자였다.] || || '''직업''' ||[[시인]] || || '''활동''' ||[[1934년|1934년 -]] [[1975년]] || || '''호''' ||다형(茶兄) || || '''본관''' ||[[김해 김씨]] 경파 || [목차] [clearfix] == 개요 == 다형(茶兄)[* [[커피]]중독자로 여겨질 만큼 유난히도 커피를 좋아해 호를 이렇게 지었다고 한다.][* 그의 호를 따, 모교인 [[숭실대학교]]에서 매년 다형문학상을 시상하고 있다.] 김현승. [[대한민국]]의 [[시인(문학)|시인]]. == 상세 == [[1913년]] [[4월 4일]] [[평안남도]] [[평양시|평양]]에서 6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6세까지 부친의 목회 첫 부임지가 위치한 [[제주도]] 제주읍에서 성장하였다. 7세 이후에는 [[전라남도]] [[광주광역시|광주]]로 이주하여 [[숭일학교]] 초등과정을 수료하였다. [[평양시|평양]]의 [[숭실중고등학교|숭실중학교]]를 졸업한 후 [[1936년]] [[숭실전문학교]]에 입학해 문리과를 3년 다니다 1년을 남겨두고 병환으로 중퇴했다. 이후 [[조선대학교]] 교수로 1951년부터 8년간 재직하다 임종까지 모교인 [[숭실대학교]] 교수로 지냈으며, 1970년 한국문인협회의 학회장을 맡기도 하였다. 1934년 [[숭실전문학교]] 재학 당시 장시 <쓸쓸한 겨울저녁이 올 때 당신들은> 이 [[양주동]] 당시 [[숭실전문학교]] 교수의 추천으로 [[동아일보]]에 게재되면서부터 등단하였다. 이른바 '''눈물과 보석과 별의 시인'''이다. 1932년 [[숭실전문학교]] 의 교사로 있던 [[양주동]], [[이효석]]의 강의를 들으며 습작에 몰두하였으나 [[1933년]] 위장병으로 부득이하게 학업을 중단하게 되었고 부모가 있는 광주에 다시 내려가 요양을 하였다. 몸을 추스린 후 복학하여 시 작업에 몰두하는데, 겨울방학이 되어서도 기숙사에 혼자 남아 밤이 늦도록 시를 썼다고 한다. 그때 <쓸쓸한 겨울 저녁이 올 때 당신들은> , <어린 새벽은 우리를 찾아온다 합니다> 등의 시들을 학보인 <숭실>에 발표하였는데 이것이 양주동의 눈길을 끌어 1934년 [[동아일보]]의 문예란에 발표하여 그 당시 관례이자 관행이였던 신춘문예나 잡지 추천제도에 상관없이 문단에 등단하게 되었다. 1935년 조선시단과 [[동아일보]] 그리고 교지를 통해 <유리창>, <철교> , <이별의 시> , <묵상수제> 등을 발표하였는데, 이 무렵의 시는 식민지 시대의 고통받는 민족의 비애를 낭만적인 이미지로 자연을 예찬하고 인간의 탐구정신을 담아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의 시어들은 지나치게 세련되고 지적 언어를 구사하는 모더니스트의 성향을 보였고 같은 해 비평가 홍효민은 김현승을 "혜성처럼 나타난 시인" 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고, [[정지용]] , [[김기림]] , [[이태준(소설가)|이태준]] 등도 그에게 격려와 찬사를 보내어 이름이 시단에 일찍부터 알려지게 되었다. 1936년 경 고질적인 위장병의 재발과 [[숭실학교]]의 신사참배 거부로 인한 폐교[* 자세한 내용은 [[숭실대학교]] 문서 참고]로 김현승은 졸업을 1년 남긴채 광주에 돌아와 [[숭일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다. 그러나 숭일학교에서도 역시 신사참배 거부 사건에 연루되어 학교에서 파면되는 수모를 겪었다. 1948년 [[광복]]과 더불어 광주의 [[호남신문]]에 잠시 있었으나 [[숭일학교]]로 자리를 옮겨 교감으로 취임하였다. 그는 이 무렵 [[경향신문]]을 비롯하여 여러 신문과 잡지에 <내일> , <민성> , <창> , <조국> , <자화상> 등과 같은 시편을 발표하였고 [[서정주]], [[김동리]] , 조연현등과 교류하며 문단활동의 폭을 넓힌다. 1950년에는 <생명의 날>, <가을 시첩> 등을 발표하였고 이때부터는 작품의 성향이 다소 바뀌어 인간의 고독이나 허무와 같은 근원적 문제에 대하여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또 이러한 성향은 [[기독교]]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는데, 절대적인 신을 확인하고 그에게 더 가까이 가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도 볼 수있다. 기독교 정신에서 보여지는 높은 윤리성의 실현을 과제로 삼고, 생명,순결,진실등의 관념으로 수렴하려는 태도를 보여준다.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난 뒤에 광주에서 박흡, 장용건, 손철, [[이동주]] 등과 계간지 <신문학>을 창간하기도 하였다. 1951년 4월에 [[조선대학교]] 교수로 임명되었다. 자신의 4살 아들이 병을 얻었으나 전쟁으로 인한 물자 빈곤, 그리고 가난 때문에 약도 제대로 쓰지 못한 채 잃게 되었고 이 비극은 그의 시 <눈물>에서 애통함을 엿볼 수 있다. 1955년에는 한국문학가협회 중앙위원으로 피선되었고 제1회 도문화상을 수상하였다. 1957년에는 첫 시집 <김현승시초(金顯承詩抄)>를 발간하고, 1958년에 제1회 한국시인협회 수상자로 결정되었으나 수상을 거부하여 화제였다. 1960년 교수로 몸담고 있던 [[조선대학교]]의 문리과대학장 자리 교섭을 받았으나 사절하고 모교인 [[숭실대학교]] 부교수를 취임하였다. 1961년, 한국문인협회의 이사로 피선되었고 이듬 해인 1962년 12월에 재선되었다. 1963년 김현승은 2번째 시집 [옹호자의 노래]를 간행하였다. 여전히 시풍을 간직하였으나 정치에 대한 현실에 대하여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1964년에는 [[숭실대학교]] 교수로 승진되었고 1968년에 3번째 시집인 <견고한 고독>을 내놓는다. 인간의 근본적인 허무로 인한 고독의 발견을 노래한다. '''견고한 고독'''은 현실에 타협하지않고 홀로 맞서, 시대를 거부하는 내면의 의지였던 것이다. 1970년 4번째 시집 <절대고독>에서도 이 같은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무렵 <현대문학>의 추천위원으로 활동하며 이론서 <한국 현대시해설>을 간행했다. 1970년부터 1973년까지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에 3선 되고, [[숭실대학교]] 문리대 학장을 역임하였다. 1973년 <김현승 시집전>을 출간하고, '서울시문화상' 예술부문을 수상한다. 3월 하순, 차남의 결혼식을 치르고 고혈압으로 쓰러져 한달만에 회복하였고 이 뒤로 신앙에 몰두하여 병원과 교회를 오가는 생활을 하였다.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몸으로 다시 [[숭실대학교]]에 강의를 나갔다가 1975년 4월, [[숭실대학교]] [[채플]] 시간 도중 쓰러지며 [[서대문구]] 자택으로 옮겨졌으나 사망하였다. == 관련 문서 == * [[가을의 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