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澥 [[1534년]]([[중종(조선)|중종]] 29) ~ [[1593년]]([[선조(조선)|선조]] 26) [목차] == 개요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예안 김씨|예안]](禮安), 자는 사회(士晦), 호는 운송(雲松), 설송(雪松). == 상세 == 1534년 [[충청도]] [[공주시|공주목]] 우정면 경사동(현 [[충청남도]] [[공주시]] 우성면 내산리 정사골마을)에서 통훈대부(通訓大夫:정3품 문관의 품계) 행 영흥도호부사(行永興都護府使:종3품)를 지낸 아버지 김반천(金半千)과 어머니 [[창녕 조씨]] 생원 조세우(曺世虞)[* 1513년(중종 8) 식년시 생원시에 3등 45위로 입격하였다.[[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a_1513_002222|#]]]의 딸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http://gongju.grandculture.net/gongju/toc/GC01700677|#]] 아버지 김반천과 증조부 김수손(金首孫), 고조부 김신(金新)이 모두 문과 출신으로 관직에 나아갔던 명문가 출신이었다.[* 아버지 김반천은 1516년(중종 11) 식년시 진사시에 3등 49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a_1516_042379|입격하고]] 1537년(중종 32) 별시 문과에 병과 3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MN_6JOa_1537_002994|급제하였다]]. 증조부 김수손(金首孫)은 생원시에 입격하고 1456년([[세조(조선)|세조]] 2) 식년시 문과에 정과 4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MN_6JOa_1456_001079|급제]], 경력(經歷:종4품)을 지내다가 1476년([[성종(조선)|성종]] 7) 중시 문과에 3등 2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MN_6JOa_1476_001631|급제하여]] [[형조]] [[참판]](종2품)에 올랐다. 고조부 김신(金新)은 1464년([[세조(조선)|세조]] 10) 온양별시 문과에 정과 4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MN_6JOa_1464_001284|급제하여]] [[사헌부]] 장령(掌令:정4품)에 올랐다.] 1558년([[명종(조선)|명종]] 13) 식년시 진사시에 3등 56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a_1558_004733|입격하고]] 1564년(명종 19) 식년시 문과에 을과 2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MN_6JOa_1564_003596|급제하였다]]. 1571년(선조 4) 선무랑(宣務郞:종6품 문관의 품계) 수(守) [[형조]] [[좌랑]](정6품)으로 있던 중 [[명종실록]] 편수관(編修官)으로 참여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ma_200001|#]] 1574년(선조 7) [[사헌부]] 장령(掌令:정4품)에 [[http://sillok.history.go.kr/id/kna_10712101_001|제수되고]] 1576년 [[사간원]] 사간(司諫:종3품)에 [[http://sillok.history.go.kr/id/kna_10909027_001|제수되었다]]. 1582년(선조 15) 비위 사실이 발견되어 추고당하기도 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na_11508003_001|#]] 그러다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당시 상주목사(尙州牧使:정3품)로 있었는데, 당시 [[순변사]] [[이일]]이 상주목에 당도했다는 것을 듣고는 순변사의 행차를 맞이한다는 핑계로 도주하여 인근 산골짜기로 들어가 숨어들었다. 이 때문에 상주 고을에는 서열 2위의 판관(判官:종5품)이었던 [[권길]]만이 남아 있었다. 이후 권길은 순변사 이일이 도착한 이튿날 저녁에 왜적을 맞아 싸우다가 [[상주 전투|장렬히 전사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nb_12504014_008|#]] 그러나 은신하던 중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당시 별장(別將:종9품)으로 상주 갑장산(甲長山) 영수암(永修庵)에 진을 치고 있던 [[정기룡]]에게 급보를 올리고 임시 판관(假判官)에 임명한 뒤 합세하였고, 향병(鄕兵)을 규합하여 [[김천시|개령현]]에서 왜군을 격파하고 상주성까지 일시 탈환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이듬해 왜적에게 포위되어 항전하다가 전사하였다.[[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0962|#]][[http://sillok.history.go.kr/id/kna_12709013_004|@]] [[분류:조선의 문관]][[분류:임진왜란/군인]][[분류:임진왜란/사망자]][[분류:공주시 출신 인물]][[분류:예안 김씨]][[분류:1534년 출생]][[분류:1593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