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동명이인, rd1=김학규(동명이인))]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김학규}}}'''[br]'''金學奎'''}}}}}}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김학규1.jpg|width=100%]][br]{{{-2 광복군 시절}}}}}}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김학규2.jpg|width=100%]][br]{{{-2 해방 이후}}}}}} || || '''호''' ||백파(白波) || || '''본관''' ||[[안동 김씨]][*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0927|#]]] || ||<|2> '''출생''' ||[[1900년]] [[11월 24일]] || ||[[평안남도]] [[숙천군]] 평리면 사산리[* [[http://www.hmh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3948|#]]][br](현 [[평안남도]] [[숙천군]] 사산리) || ||<|2> '''사망''' ||[[1967년]] [[9월 20일]] || ||[[서울특별시]] [[마포구]] [[망원동]] 57-188번지 자택 || || '''학력''' ||[[신흥무관학교]] {{{-2 (졸업)}}}[br]문회고급중학교 {{{-2 (졸업)}}} || || '''복무기간''' ||[[1940년]] ~ [[1946년]] || || '''주요'''[br]'''경력''' ||동명중학교 교사[br][[조선혁명당]] 군사령부 참모장[br][[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참모장[br][[한국광복군]] 제3지대대장[br][[한국광복군]] 주상해판사처처장[br][[한국독립당]] 동북특별위원회 위원장, 당수 || ||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50호 || ||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본관은 [[안동 김씨|안동]](安東). == 생애 == 1900년 11월 24일 [[평안남도]] [[숙천군]] 평리면 사산리(현 숙천군 사산리)에서 아버지 김기섭(金基燮)의 아들로 태어났다. 10살의 어린 나이에 [[만주]]로 건너가, 만주 통화현 이밀에서 개간을 하면서 지내다 신흥학교가 [[신흥무관학교]]로 개편되자 입학했다. 신흥무관학교 졸업 후 [[조선의용대]]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일본 제국]]의 탄압으로 [[독립군(한국)|독립군]] 활동이 어려워지면서, 만주 봉천 신민현의 학교에서 신학문을 익힌 뒤 동명중학교에서 잠시 교편을 잡기도 했다. 1929년, [[양세봉]] 등이 조직한 [[조선혁명군]]에 들어가서 양세봉의 참모장으로 활동했다. 1935년 남경 통일회의에 참석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계하게 된다. 이후 [[조선혁명당]] 등을 거쳐 1940년 [[광복군]]이 결성되자, 광복군 제3지대장에 임명되었다. 미국 [[OSS]]와 연계하여 국내진공작전을 추진했지만, 1945년 [[8.15 광복]]이 이뤄지면서 성사되지 못했다. == 광복 이후 == 광복 후 중국 내 동포들의 국내 귀환을 추진해서 동포들의 귀국에 일조했고, 1948년이 되어서 10살에 떠났던 조국에 겨우 돌아올 수 있었다. 귀국 직전까지 광복군 평진지대(平津支隊)[* 북평(北平)과 천진(天津) 일대에 주둔하여, 지역명을 합성한 부대명. 당시 [[중화민국]]의 수도는 [[난징]]이었으므로, [[베이징]]은 북경이 아닌 북평으로 불렸다.]의 지대장을 역임했다. [[일본군]], [[만주군]]에 소속되어 있던 한인 병력을 대거 받아들여, 해방된 조국에서 창설될 군대의 기반을 닦을 심산이었지만... 고의적으로 일체의 정치 단체를 인정하지 않던 [[미군정]]에 의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자격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귀국 이후 한국독립당의 조직부장을 맡았다. 1949년, [[서북청년회]] 단원 홍종만의 소개로 [[안두희]]를 한국독립당에 가입시키고 [[김구]]에게 소개시켜 준다. 덕분에 안두희는 별다른 의심을 받지 않고 김구에게 접근할 수 있었다. 김구 암살 직후 열린 재판에서 홍종만은 김학규가 군내에 한독당의 비밀당원을 늘리기 위해 안두희를 가입시켰다고 증언했다. 이 때문에 김학규는 김구의 살인교사범으로 몰려 군법회의에서 징역 15년형을 선고 받았다. 그러나 [[4.19혁명]]이 일어난 직후인 1960년 5월, [[허정]] 과도 정부는 김학규를 석방해주었다. 이후 1960년 한국독립당을 재건하여 최고 대표위원을 지냈고,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 한독당 후보로 [[경기도]] [[화성시|화성군]] 을에 출마했으나 [[서태원(1923)|서태원]]에 밀려 낙선했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훈하였다. 1967년 9월 20일 서울특별시 마포구 망원동 57-188번지 자택에서 신병으로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67092200329203030&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7-09-22&officeId=00032&pageNo=3&printNo=6753&publishType=00020|별세했다]]. 그의 유해는 1968년 9월 26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이장되었다. == 선거이력 == || 연도 || 선거종류 || 소속정당 || 득표수(득표율) || 당선여부 || 비고 || || 1960 || [[제5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화성시|화성군]] 을) || [[한국독립당]] || 1,825표 (4.26%) || 낙선 (9위) || || == 기타 == [[파일:김학규.png]] [[Hearts of Iron II]]에서 중화민국 육군 소장으로 등장하며 책략가 특성을 가지고 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한국광복군/군인]][[분류:대한민국의 남성 정치인]][[분류:실향민]][[분류:숙천군 출신 인물]][[분류:안동 김씨]][[분류:당 대표/대한민국]][[분류:1900년 출생]][[분류:1967년 사망]][[분류:신흥무관학교 출신]][[분류:국립서울현충원 안장자]][[분류:건국훈장 독립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