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1548년 출생]][[분류:1631년 사망]][[분류:광산 김씨]][[분류:중구(서울) 출신 인물]][[분류:조선의 관리]][[분류:조선의 성리학자]] [include(틀:문묘 배향 18현)] ---- [include(틀:서인)] ---- ||<-2> '''{{{+1 김장생}}}[br]金長生'''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김장생 초상.jpg|width=100%]]}}} || ||<|2> '''출생''' ||[[1548년]] [[8월 21일]][* [[율리우스력]] [[8월 11일]].][br](음력 [[명종(조선)|명종]] 3년 7월 8일)|| ||[[한성부]] 정릉동[br](現 [[서울특별시]] [[중구(서울특별시)|중구]])|| ||<|2> '''사망''' ||[[1631년]] [[8월 29일]] (향년 83세)[br](음력 [[인조]] 9년 8월 3일)[* [[세는나이]] 84세.]|| ||[[충청도]] 연산현[br](現 [[충청남도]] [[논산시]])|| || '''시호''' ||문원(文元)|| || '''본관''' ||[[광산 김씨]]|| || '''자''' ||희원(希元)|| || '''호''' ||사계(沙溪)|| || '''부모''' ||부친 - 김계휘(金繼輝, {{{-3 1526 ~ 1582}}})[br]모친 - [[평산 신씨]] 신영(申瑛)의 딸|| || '''형제자매''' ||'''5남 3녀 중 첫째'''[* 김장생 본인과 친여동생인 김면생을 제외한 나머지 4남 2녀는 모두 서출이다.][br]여동생 - 김면생(金免生, {{{-3 1555 ~ ?}}})[br]이복 남동생 - 김의손(金義孫, {{{-3 1567 ~ ?}}})[br]김연손(金燕孫, {{{-3 조졸}}})[br]김경손(金慶孫, {{{-3 1573 ~ 1613}}})[br]김평손(金平孫, {{{-3 1577 ~ ?}}})[br]이복 여동생 - 윤경남(尹敬男)의 처[br]김종생(金終生, {{{-3 1583 ~ ?}}})[* [[김상용]]의 측실] || || '''부인''' ||{{{-3 초배}}} [[창녕 조씨]] 조어화(曺於火, {{{-3 1551 ~ ?}}})[* 조대건(曺大乾)의 딸로, [[정종(조선)|정종]]의 8남 [[임언군]]의 외고손녀. [[임언군]] → [[영산 신씨|신여걸]]의 처 이씨 → 조광원의 처 신씨 → 조대건 → 조어화][br]{{{-3 계배}}} [[순천 김씨]] - 김수언(金秀彦)의 딸|| || '''자녀''' ||'''슬하 3남 2녀'''[br]장남 - 김은(金檃, {{{-3 1567 ~ ?}}}) {{{-3 조씨 소생}}}[br]차남 - [[김집]] {{{-3 조씨 소생}}}[br]장녀 - 김씨({{{-3 1575 ~ ?}}})[* [[대구 서씨]] 서경휼(徐景霱)의 처.] {{{-3 조씨 소생}}}[br]3남 - 김반(金槃, {{{-3 1580 ~ 1640}}}) {{{-3 조씨 소생}}}[br]차녀 - 김씨({{{-3 1581 ~ ?}}})[* [[청주 한씨]] 한덕급(韓德及)의 처.] {{{-3 조씨 소생}}}||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 중기의 [[문신(동음이의어)#文臣|문신]], [[학자]], [[정치인]]. [[문묘#한국]] 배향 동방 18현 중의 1명이다. == 생애 == 아버지는 [[사헌부]] 대사헌 김계휘(金繼輝)이다. 김계휘와 [[평산 신씨]] 신영(申瑛)의 딸의 자식으로 장남 [[김장생]], 장녀가 있는데 김계휘와 측실의 자식 중 서자 김의손(金義孫), 서자 김연손(金燕孫), 서자 김경손(金慶孫), 서자 김평손(金平孫), 그리고 2명의 서녀가 있다. 즉 [[강변칠우]] 사건의 김경손은 [[김장생]]의 이복 동생이며 김장생은 김경손의 적형(嫡兄)이 된다. [[송익필]]로부터 사서 등을 배웠으며 [[이이(조선)|이이]]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1578년 처음으로 관직길에 나섰으며 1581년 [[종계변무]]의 일로 아버지를 따라 [[명나라]]에 다녀와서 돈녕부 참봉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호조(조선)|호조]] 정랑이 되었으며 1597년에 군자감 첨정이 되었다가 [[안성시|안성]] 군수가 되었다. 조정에 잠시 나갔다가 [[북인]]의 득세로 귀향하였고 이후 1613년 [[계축옥사]] 당시 이복 동생 김경손이 [[강변칠우]]의 하나로 체포되어서 광해군이 강변칠우 중 하나인 박응서에게 김장생이 옥사에 연루되어 있는지 물었으나 박응서는 "신들의 음모를 이명준[* 강변칠우 일원 이경준의 적형이다.]과 김장생이 듣지 못했을 뿐만이 아니라 역적의 패거리들이 혹시라도 그들의 음모를 두 사람이 알까 걱정하였다."라고 말해서 김장생은 화를 피할 수 있었다. [[http://sillok.history.go.kr/id/koa_10505003_004|#]] 박응서의 진술로 김장생이 무혐의로 풀려나자 김장생은 관직을 버리고 [[논산시|연산]]에 은둔했다.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조정에 출사했으나 병으로 다시 귀향했다. [[이괄의 난]]으로 [[인조]]가 [[공주시|공주]]로 파천오자 어가를 맞이하였으며 이괄의 난이 평정된 뒤 다시 조정에 출사했다. 이후 원자의 강학을 담당했고 왕의 시강과 경연에 초치되었으며 또다시 귀향하여 이이와 [[성혼]]을 제향하는 황산 서원을 세웠는데 [[정묘호란]] 때에는 노구를 이끌고 [[의병]]을 모아 공주로 온 [[소현세자]]를 호위했다. 늦은 나이에 벼슬을 시작하고 과거를 거치지 않아 낮은 직책을 전전했으나 [[이귀]]와 함께 이이, 성혼의 학문을 계승하는 서인의 영수격으로 활약했다. 특히 향리에서 머무르는 동안 아들 [[김집]]부터 시작하여 [[송시열]], [[송준길]] 등이 죄다 그의 밑에서 수학하였고 이들은 서인의 학문적인 계통을 담당하는 주요 인사들이 되었다. 김장생이 저술한 『가례집람』 도 1685년에 송시열 등의 그의 제자들에 노력에 의해 간행될 수 있었다. 예학에 정통한 인물로 그에게 배운 제자들이 이후 조선의 권력자들이 되었기 때문에 형식적인 예법에 치우친 [[유교]] 원칙주의자들의 중시조 격인 인물이다. 1688년 [[문묘]]에 종사되었으며 아들 김집도 뒤늦게 종사됨에 따라 부자가 문묘에 종사되는 유일한 사례가 되었다. 김장생의 증손자는 형제 대제학이자 [[숙종(조선)|숙종]]의 1번째 장인인 [[김만기(조선)|김만기]]와 [[구운몽]]으로 유명한 [[김만중]]이 있고, [[현종(조선)|현종]] 시기 [[서필원]]의 공의, 사의 논쟁을 유발한 김만균도 있다. == 여담 == * 이복 동생 김경손이 [[강변칠우]]의 일원이다. * 2019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한국]]의 서원' 중 논산 [[돈암서원]]은 김장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서원]]이다. * 한능검 고급 44회 19번 문제에 갑툭튀해 수험생들을 당황시켰다.[* 사실 다른 선택지를 소거하는 방식으로 풀었다면 쉽게 풀 수 있는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