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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원권}}}[br]金源權 | Kim Wonkwon''' || ||<|2> '''출생''' ||[[1918년]] [[12월 13일]] ('''[age(1918-12-13)]세''') || ||[[황해남도]] [[해주시]] || || '''국적''' ||[include(틀:국기, 국명=일본)][* 1948년 런던 올림픽 이후 일본으로 귀화.]|| || '''종목''' ||[[육상]] || || '''주종목''' ||세단뛰기 || || '''가족''' ||부모님, 형 김원룡[* 역시 육상 선수였으며 주종목은 높이뛰기였다. 형도 조선신기록을 세우는 등 재능을 과시했다. [[1948 런던 올림픽]]에 형 김원룡은 임원으로, 동생 김원권은 선수로 참가하였다.] || [목차] [clearfix] == 개요 == [[일본]]의 前 남자 [[육상]] 선수이다. == 선수 경력 == [[보성전문학교]]로 진학해서 대학생 신분이던 1939년 [[오스트리아]] [[빈(오스트리아)|빈]]에서 열린 국제대학경기대회(現 [[유니버시아드]] 대회의 전신)에 출전하여 15.37m의 기록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당시 일본은 [[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 세단뛰기 종목에서 오다 미키오가 일본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을 딴 이후로 올림픽 세단뛰기 3연패를 하며 세단뛰기 세계 최강국으로 군림하고 있었고, 1940 올림픽이 자국 [[도쿄도|도쿄]]에서 개최될 예정인지라 세단뛰기 4연패가 유력한 상황이었고 그 주인공이 바로 김원권이었다. 실제로 1940년 세단뛰기 세계 최고기록은 김원권이 세운 15.68m였고, 1939년엔 비공인이긴 하나 16.25m로 당시 세계신기록에 해당하는 기록을 내기도 했다. 그러나 [[중일전쟁]]의 여파로 일본은 올림픽 개최권을 반납했고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지면서 올림픽 자체가 취소되며 김원권의 올림픽 금메달의 꿈은 무산된다. 예정대로 대회가 개최됐다면 [[손기정]]에 이어 두 대회 연속 조선인 금메달리스트가 배출될 것이 유력했으니 아쉬움이 많이 남을 수밖에 없다.[* 비슷한 케이스로능 역도의 [[김성집]], 남수일, 박동욱이 있다. 이 선수들은 각각 밴텀급과 페더급, 미들급에서 세계신기록을 경신하는 등 일본 역도계를 평정한 것을 넘어 1940 올림픽의 금메달 후보로 꼽혔지만 대회가 무산되었다. 이 선수들은 모두 해방 이후 대한민국 국적으로 [[1948 런던 올림픽]]에 출전했고 김성집은 3위, 남수일은 4위, 박동욱은 10위를 기록했다.] 이후로도 1941년부터 1943년까지 연도별로 세계 최고기록을 세우며 세단뛰기 최강자로 군림했다. 해방 이후 [[1948 런던 올림픽]]에 출전하여, 예선에서 7위로 통과하며 대한민국 올림픽 육상 최초로 결선에 진출했다. 결선에서는 14.25m의 기록으로 12위에 그쳤다. == 평가 == 재능이 역대급이였다고 평가받는다. 당시 본인이 수립한 15.86m의 최고기록은 1984년까지 한국 신기록이었다. 김원권 이후 어떠한 한국인도 40년 넘게 이 기록을 넘지 못하다가 1984년 박영준[* 이 선수가 훗날 은퇴한 후 코치로서 가르친 선수가 [[김덕현]]이다. 김덕현은 김원권과 마찬가지로 [[유니버시아드]]에서 금메달을 따며 육상 전체를 통틀어 세계 수준에 근접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몇 안되는 선수로 꼽혔다.]에 의해 경신되었다. 시대 보정도 필요없는 수준이었으며, [[마라톤]] 이외 종목에서 한국 역사상 거의 없었던 세계 최고 레벨의 육상 선수였다. == 은퇴 이후 == [[고려대학교]] 교수 등을 역임했으며 런던 올림픽 이후 일본으로 [[http://www.sportsseoul.com/news/read/1016711?ref=naver:|귀화했다고 한다.]] 노년을 [[일본]] [[고베시]]에서 보내고 있다는 점 외에는 이후 행적이 알려지지 않았다. [각주] [[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육상 선수]][[분류:해주시 출신 인물]][[분류:1918년 출생]][[분류:대한민국의 올림픽 육상 참가 선수]][[분류:1948 런던 올림픽 육상 참가 선수]][[분류:일본으로 귀화한 인물]][[분류:잠적한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