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파일:김동식2.jpg|width=300px]] || || 성명 ||김동식(金東植) || || 이명 ||김유신(金攸信) || || 생몰 ||[[1899년]] [[3월 21일]] ~ [[1989년]] [[4월 28일]] || || [[출생지]] ||[[평안북도]] [[의주군]] 월화면 월하리 || || 사망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제1동 || ||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 김동식은 1899년 3월21일 평안북도 의주군 월화면 월하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1 운동]]에 감화되어 독립단에 가입했고, 1920년 3월 백운기(白雲起)·안효준(安孝俊) 등과 함께 대한청년결사대원으로서 의주군 비현면 정산동에 거주하는 김대호에게서 군자금으로 현금 40원을 받아냈다. 이후 5월 말까지 의주, 용천, 철산, 선천 등 10개면 내에서 군자금 3천원을 각출했으며, 김시황(金時晄)·[[박초식]]·백운기(白雲起) 등과 함께 보합단(普合團)을 의주 동암산(東岩山)에서 조직해 총무로서 활동했다. 한편 독립단과도 계속 연락을 취하여 무기를 구입, 적 기관 파괴와 주구 숙청에 힘을 쏟았으며, 1920년 6월에 부원 30명을 이끌고 부역배 수 명을 사살했다. 선천군 내산사에 잠적했을 때는 승려의 밀고로 일본 경찰 30여 명과 교전한 후 퇴각하기도 했고, 1920년 11월 서울에 파견된 [[김도원(독립운동가)|김도원]]이 경찰과 총격전을 벌인 끝에 체포되자 장희원(張喜源)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여 [[쑨원]]의 소개로 황포군관학교에 취학했다. 그러나 [[천중밍]]이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학업을 끝까지 이루지 못하고 낙양강무당(洛陽講武堂)에서 수업하던 중 [[직봉전쟁]]에 참가해 [[우페이푸]]의 참모를 맡기도 했다. 1924년 중국 육군 중위 교관으로 임명되어 한인 청년 30여 명을 독립군으로 양성했으며, 1937년 이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따라 전전하다가 홍콩에서 활동하기도 했지만 [[태평양 전쟁]] 발발 후에는 은신했다. [[8.15 광복]] 후 국내로 귀환하여 서울 서대문구 홍제1동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1989년 4월 28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김동식에게 건국포장을 수여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분류:의주군 출신 인물]][[분류:1899년 출생]][[분류:1989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국장]][[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실향민]]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김동식(독립운동가), version=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