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고원군 출신 인물]][[분류:1884년 출생]][[분류:몰년 미상]][[분류:건국훈장 애족장]][[분류:납북자]]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운동가|{{{#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br] {{{#ffffff '''{{{+1 김기헌}}}'''[br]'''金基憲'''}}}}}} || ||<|2> '''출생''' ||[[1896년]] [[4월 11일]] || ||[[함경남도]] [[고원군]] 하발면 동산리 || ||<|2> '''사망''' ||몰년 미상 || ||사망지 미상 || || '''이명''' ||김고주(金高洲) || ||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김기헌은 1896년 4월 1일 함경남도 고원군 하발면 동산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2월 말 서울에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정춘수]]의 지시를 받은 [[곽명리]]의 설득을 받아들이고 이가순, 이순영, [[차광은]], 차용운, 이진구, 김장석, 김계술, 정연수, 인이극, [[함태영]] 등 14명과 함께 진성여학교(進誠女學校)에서 만나 의논한 끝에 3월 1일에 원산 시장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하고 밤을 세워가며 태극기를 제작했다. 3월 1일 오후 2시, 그는 각 교회의 종소리를 신호로 13명의 주동자들과 함께 시내 요소요소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장촌동 장터로 행진했다. 그 후 이곳에서 8백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일본인 집단 거주지를 지나서 원산경찰서로 행진하였다. 이때 일본 경찰·헌병·소방대가 출동하여 물감을 탄 물을 소방용 호스로 뿌리며 해산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시위군중이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 만세운동을 전개하자, 이번에는 공포를 쏘아서 오후 6시경 강제 해산하였다. 그 후 일본 경찰은 옷에 물감이 묻은 사람을 집중적으로 체포하였는데, 김기헌도 이때 붙잡혀, 이해 7월 3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1932년 일본 오사카로 건너간 그는 그곳에서 동포들의 권익 옹호를 위한 조선인차가동맹(朝鮮人借家同盟)을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다시 붙잡혔다. 이로 인해 징역 8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8.15 광복]] 후 귀국하여 서울에 거주했으나 [[6.25 전쟁]] 때 납북되었고, 이후의 행적은 알 수 없다. [[국가보훈처]]는 6.25 전쟁 시기 김기헌의 행적을 알 수 없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건국훈장 서훈을 미뤘다. 이에 대해 하와이에 거주하는 딸 김년자(金年子)가 항의글을 [[조선일보]]에 게재하기도 했다.[[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2/03/24/2002032470147.html|#]] 그러다 2002년에야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