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명 ||김규환(金奎煥) || || 이명 ||김이대(金履大), 김검군(金劒君) || || 본관 ||[[김(성씨)|광주 김씨]][* [[https://news.joins.com/article/2034683|#]]] || ||<|2> 출생 ||[[1890년]] [[6월 12일]] || ||[[평안도]] [[선천군|선천도호부]][br](현 [[평안북도]] [[선천군]]) || ||<|2> 사망 ||[[1941년]] [[1월 13일]] || ||[[평안북도]] [[선천군]] || ||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충혼당 320호실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였으나 [[만주사변]] 이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전락한 인물.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으나 2019년 서훈 취소되었다. == 생애 == 김규환은 1890년 6월 12일 평안도 선천도호부(현 평안북도 선천군)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9년 [[남형우]], [[안희제]], [[김동삼]] 등 8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신민회]] 계열의 비밀청년단체인 대동청년당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의 활로를 모색했다. 1910년 8월 [[한일병합]]이 선포되자, 1911년 5월 [[청나라]] [[봉천성|봉천부]] 회인현(懷仁縣)[* 현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번시시]] 환런만주족자치현(桓仁滿族自治縣).]으로 망명하여 [[윤세복]] 등과 함께 동창학교(東昌學校)를 설립해 교포들에게 독립사상 고취와 구국교육을 실시하였다. 동창학교가 일제의 압력과 운영 자금 미비로 인해 폐쇄된 뒤 1915년 6월에 김관제(金觀濟), 이시열(李時說) 등과 함께 흥경현 동로홍묘자에 일신학교(日新學校)를 설립하여 독립사상을 교육하였다. 일신학교는 1916년에 흥동학교(興東學校)로 개칭되었다. 이후 1920년 광한단 부위원장을 역임했으며, 1922년 [[대한통의부]]에 가담했고, 1925년 대한정의부, 1926년 정의부, 1929년 국민부에 잇달아 가담했다. 또한 1929년 [[조선혁명당]]이 창당되었을 때 중앙위원으로 선임되기도 했다. 그러나 1929년 11월 초 [[봉천성]] 동변도(東邊道) 흥경현(興京縣)[* 현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푸순시]] 신빈만주족자치현(新賓滿族自治縣).]에서 중국 관헌에게 체포되었다는 기사가 [[매일신보]] 1929년 12월 5일자에 실린 뒤, 그는 친일파로 변절했다.[* 1933년 말까지 [[흥사단]] 원동위원회 단원으로 활동한 기록이 있으므로, 정확한 변절시기는 1933년 말 이후인 것으로 추정된다.] 1934년 9월 간도협조회가 조직되었을 때 위원장을 역임했으며, 1936년 12월 간도협조회가 [[협화회|만주국협화회]]에 합병되었을 때 위원으로 활동했고, 이후 [[http://db.history.go.kr/id/ma_016_0540_0160|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또한 [[김승학]]은 '망명객행적록'에서 1930년대 중반 [[요녕성]] 환인현(桓仁縣) 일본영사관 소속으로 독립운동가들을 일제 귀화시키는 사업에 앞장선 인물이 김검군(金劒君)인데, 이 자가 곧 만주국 선무반 책임자 김이대라고 기록했다. 이렇듯 만주에서 독립운동가 회유에 앞장서며 친일 행적을 벌이던 김규환은 1941년 1월 13일 평안북도 선천군에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본적지인 [[경기도]] [[고양군]] 선영에 안장되었다가, 이후 [[국립서울현충원]] 충혼당 320호실에 이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7년 김규환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하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러나 그가 만주사변 이후 친일 행적을 벌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2019년 서훈 취소되었다. 하지만 그의 유해는 현재까지 [[국립서울현충원]]에 남아 있다. [[분류:일제강점기의 인물]][[분류:선천군 출신 인물]][[분류:광주 김씨]][[분류:1890년 출생]][[분류:1941년 사망]][[분류:국립서울현충원 안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