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예루살렘 왕국의 인물]][[분류:예루살렘의 가톨릭 대주교]][[분류:역사가]][[분류:1186년 사망]][[분류:예루살렘 출신 인물]] || [[파일:Guillaume de Tyr.jpg]] || || 역사서를 편찬하는 기욤 드 티레 || [목차] == 개요 == 기욤 드 티레(Guillaume de Tyr. 영어로는 William of Tyre) ([[1130년]] 경 ~ [[1186년]] [[9월 29일]])는 [[십자군]] 시대의 [[수상]]이자 [[연대기]] 역사가, [[티레]]의 [[대주교]]였다. == 생애 == 기욤 드 티레는 [[예루살렘 왕국]]이 [[보두앵 2세]]의 정복 전쟁이 한창인 전성기 시절, 수도 [[예루살렘]]에서 1세대의 유럽인들의 자식으로 토종 우트르메르의 첫번째 세대로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냈다. 부모는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태생으로 [[시칠리아 왕국]]의 노르만인이었을 것으로 예상되고 예루살렘 왕국에 상인이었던 형제가 있었으니 의심의 여지없이 그들은 귀족에 속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멜리장드]]의 아들 [[보두앵 3세]]와 친구이자 동기로 예루살렘 왕국 최고의 교육기관인 [[성묘교회]]에서 라틴어 및 중세 자유과(Liberal arts)[* 쉽게말해 인문(人文). 자유 7과라고도 하며 중세 그 시대를 살아가는 '교양있는 지식인'이 갖춰야할 소양과 그에 관련된 학문으로 시절마다 종류가 변경되기도 했지만 대체로 문법, 수사학, 변증법, 산술, 기하학, 음악, 천문 7가지이다.]와 그리스어 아랍어 같은 다양한 학문과 문화를 공부했으며, [[1145년]] 무렵에는 장장 20년 동안 [[파리(프랑스)|파리]]에서 후세에 파리 [[주교]]가 되는 피에르 롱바르(Pierre Lombard)와 인문학을 [[1155년]]부터는 [[오를레앙]]에서 신학 교회법(Canon law)을, [[1161년]]부터는 중세시대 가장 권위있는 법학대학인 [[볼로냐 대학교]]에서는 [[법학]]을 전공했다. ||
[[파일:Manuel I Comneno-Guillaume de Tyr.jpg]] || || [[마누엘 1세]] 황제를 알현하는 기욤 드 티레 || [[1165년]] 기욤 드 티레가 인문학과 교회법 신학, 마지막으로 법학 과정을 마쳤다. 현대와 비교해보자면 삼중 박사(Dr. Dr. Dr. Guillaume de Tyr)라는 --[[넘사벽]]-- 학벌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강림]]-- 귀환하자, [[문관]] 인재난에 시달리던 [[아모리 1세]]는 곧바로 등용하여 [[아크레]] 대성당의 의전사제, [[1167년]] [[티레]]의 부주교를 거쳐, [[1168년]] [[이집트]] [[파티마 왕조]]를 상대로 한 [[동로마 제국]]과 [[예루살렘 왕국]]의 연합 원정을 위한 조약을 체결하기 동로마 제국의 [[특명전권대사|대사]]로 파견되었다. 협상은 잘 마무리 되었고 [[아모리 1세]]의 네 번째 원정대는 동로마 해군의 지원을 받은 최초의 정복전쟁이었다. 전황은 [[나일강]] [[삼각주]]의 [[다미에타]]까지 정복했지만 수 년뒤 '''[[살라흐 앗 딘 유수프|살라딘]]'''이 나타나 전선을 물러야 했다. [[1169년]]에는 교황청과 왕국의 갈등을 봉합하기 위해 [[로마]]를 방문했고 [[1170년]] 귀환하여 역사서를 쓰기 시작했다. 그는 당시 왕자였던 [[보두앵 4세]]의 스승으로 그를 지도했고 보두앵 4세가 또래 아이들과 얼굴을 꼬집는 게임--중세 놀이수준보소--에서 백전백승하는 기염을 토하면서 고통을 느끼지 않는 행실을 보이자 [[나병]]환자라는 것을 진단하고 부왕에게 보고했다. 모든 수를 써서 치료를 했지만 중세 의학수준에서는 나병은 불치병[* 현대는 극심한 병세가 아니라면 리팜핀(리팜피신) 600mg을 1회만 복용하고 여러가지 항생제를 삼키면 완치가 되버린다.]이라 병세는 서서히 커져갔다.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aldwinIV.jpg]] || || [[보두앵 4세]][* 아이들 몸과 얼굴에 멍이 잔뜩 들어있고 [[보두앵 4세|보두앵]]이 상대편 아이의 볼을잡고 심판인 듯한 아이가 손을 들고 있다.]의 나병 증상을 의심하는 기욤 드 티레[* 확실히 중세 성직자라 그런지 남겨진 그림이 전부 --원형탈모--소갈머리.] || [[아모리 1세]]의 사후 [[보두앵 4세]]가 등극하자, 왕의 스승인 기욤 드 티레는 당시 중세인들에게 지상아래 가장 성스러운 장소인 [[예루살렘 왕국]]에서 가장 권위있는 직책인 대주교와 수상을 겸임했다. [[1179년]] [[로마 가톨릭]] [[교황청]]에서 [[공의회|제 3차 라테란 공의회]][* 대립교황의 난립의 폐해를 막기 위한 교황 선출권 개정([[콘클라베]] 초기모델), 카타리파 이단선언, 주교좌 성당에 교육교사 상주 등 총 27장의 규정을 결의했다.]가 개회했는데, 그리스도교 세계 각지에서 모인 300여명의 주교들을 비롯해 수도원장들은 물론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거의 모든 왕과 제후들이 참석하는 가운데 [[십자군]]의 승리로 수백년 만에 정식으로 복구된 동부 기독교 대표단을 모조리 이끌고 참석하는 극강의 위세를 뿜었다. 전성기를 구가하던 그는 [[1180년]] [[예루살렘 총대주교]] 선거에서 왕의 모후 아그네스 드 쿠르트니의 [[기각]]으로 낙선하고 대신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헤라클레스 드 오베르뉴(Héraclès d'Auvergne)'''가 당선되자 내리막길을 걷게된다. 게다가 나병왕 [[보두앵 4세]]의 통치 기간에 발발 된 후임 왕권 투쟁이 정리가 되었는데 기욤 드 티레는 [[이벨린의 발리앙|발리앙 디벨린]]과 [[왕당파]] 측에서 관여했기 때문에, [[예루살렘 총대주교]]와 [[기 드 뤼지냥]]의 귀족 파벌이 왕실을 장악했을 때 그의 입지는 현격하게 줄어들었다. 급기야 [[1183년]] 예루살렘 총대주교 헤라클레스에게 [[파문]]까지 당하는 굴욕을 당하고 [[로마]]로 내몰리듯 건너가져 버렸다. [[1186년]] [[기 드 뤼지냥|기]]가 [[시빌라(예루살렘 왕국)|시빌라]]와 공동 국왕에 등극하자 채 한달을 못 채우고 왕국의 미래를 걱정하며 사망했다. 이후로 [[기 드 뤼지냥|기]]의 무능으로 막장 테크를 탄 [[예루살렘 왕국]]을 고려할 때 결과적으로 중세판 만고의 [[충신]]이 되어버렸다. == 유산 == 기욤 드 티레는 [[공의회|제 3차 라테란 공의회]]에 대한 기사와 [[무함마드]] 시대의 [[이슬람]] 국가에 대한 '''동양의 역사(Historia Orientalis)'''를 집필했지만 현재까지는 둘다 유실되어 제목만 존재하는 실정이다.[* 선지자 [[무함마드]]에 대한 불경한 --실화--묘사(늘그막에 9살의 아이샤와 결혼 그리고 유아와의 성관계...)가 있다고해서 무슬림들이 현상금 걸고 다 찾아내 --찢어발겼다--훼손했다는 설이 있다.] 대신에 그는 오늘날 [[예루살렘 왕국]]의 역사 저자로 유명한데, 바로 자신의 필생의 역작인 '''예루살렘의 역사(Historia Ierosolimitana)'''와 '''바다 너머에서 행해진 일의 역사(Historia rerum in partibus transmarinis gestarum)'''가 현전하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 직후에 [[프랑스어]]로 번역되었고, 그 후 수많은 다른 언어로 번역되어 중세 역사가부터 현재까지 수많은 책에 인용됐다. 그것도 그럴것이 [[12세기]] [[예루살렘]]의 원주민이 기록한 유일한 출처이기 때문에 역사가들은 [[십자군]] 연구의 정석이자 개론으로 활용되어 기욤 드 티레의 진술이 액면 그대로 취해졌다. 최근의 역사 학자들은 기욤 드 티레가 왕국의 정치적 분쟁에 개입 한 것이 그의 기록에 편향된 결과를 초래했다고 --[[뇌피셜]]--비판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연대기 역사서의 유일본이라 교차검증이 불가능해, 기욤 드 티레는 십자군 전쟁의 가장 큰 연대기 역사가로 간주되고 있고 현대의 많은 십자군 관련책들은 그것을 원전으로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