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가톨릭 대립교황)] ||<-3><:> '''[[교황]]명''' ||<-9><:> 그레고리오 8세(Gregory VIII) || ||<-3><:> '''세속명''' ||<-7><:> 모리스 부르댕(Maurice Bourdin) || ||<-3><:> '''출생지''' ||<-7><:> [[프랑스]] [[옥시타니]] [[리무쟁]] || ||<-3><:> '''사망지''' ||<-7><:> 살레르노의 라 카바 수도원 || ||<-3><:> '''생몰년도''' ||<-7><:> ? ~ 1137년 || ||<-3><:> '''재위기간''' ||<-7><:> 1118년 3월 10일 ~ 1121년 4월 22일 || [목차] [clearfix] == 개요 == 교황 [[젤라시오 2세]], [[갈리스토 2세]]에 대적한 [[대립교황]]. == 행적 == 프랑스 옥시타니의 리무쟁 출신으로, 처음에는 클뤼니 수도원에 있다가 카스티야로 유학가서 성직 교육을 받았고, 톨레도의 집사로 선임되어 톨레도 대주교 베르나르도와 함께 이베리아 반도 각지를 여행하며 포교 활동을 전개했다. 이후 톨레도 대주교 직위를 물려받았고, 1099년 코임브라의 부제가 되었다. 이후 4년간 [[예루살렘]]으로의 여정을 떠나 성지 순례를 다녀왔고, 1109년 교황 [[파스칼 2세]]에 의해 브라가 대주교에 선임되었다. 그는 카스티야 왕국의 대주교이자 교황 특사인 베르나르도와의 분쟁에 휘말려 로마로 부름을 받고 파스칼 2세에게 정직 처분을 받았다가 얼마 후 풀려났다. 이후 자신의 교구를 희생시키면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당에게 이득이 되는 정책을 실시한 것에 대해 교황청에 항의하기도 했다. 1116년 신성 로마 황제 [[하인리히 5세]]와 교황청간의 서임권 분쟁이 벌어졌을 때 추기경 몇 명과 함께 로마에 사절로 가서 하인리히 5세를 지지했다. 하인리히 5세는 로마로 갔고 1117년 3월 23일 부활절 일요일에 모리스로부터 신성 로마 황제의 제관을 씌워졌다. 이에 베네벤토로 피신했던 파스칼 2세는 하인리히 5세를 파문하고 모리스를 공직에서 해임시켰다. 그 후 하인리히 5세가 독일로 돌아간 후 1118년 1월 24일 파스칼 2세가 사망하자, 성직자들은 [[젤라시오 2세]]를 새 교황으로 세웠다. 하인리히 5세는 즉위 논란을 종식하기 위해 즉시 로마로 이동했다. 그러나 젤라시오 2세는 가에타 마을에 남아 있었고 황제와의 협상을 위해 로마로 갈 생각이 없었다. 이에 황제는 볼로냐의 이르네리우스 및 다른 법학자들의 조언에 따라 젤라시오 2세의 선출을 무효화하고 모리스를 새 교황 그레고리오 8세로 선출했다. 젤라시오 2세는 이에 맞서 1118년 4월 8일 항니리히 5세와 그레고리오 8세를 파문하고 그레고리오 8세의 교황 선출을 비난하는 편지를 유럽 전역에 배포했다. 1119년 1월 28일 젤라시오 2세가 사망하고 그 해 2월 2일 [[갈리스토 2세]]가 새 교황에 등극했다. 하인리히 5세는 갈리스토 2세와 협상하기로 마음먹었고, 그레고리오 8세는 황제의 지원이 약해지는 데다 로마의 민심이 갈리스토 2세 쪽으로 쏠리자 1119년 수트리로 피신했다. 1120년 6월 갈리스토 2세는 로마에 입성했고, 1121년 4월 수트리를 포위했다. 주민들은 4월 22일 그레고리오 8세를 넘겨주기로 했고, 갈리스토 2세는 그레고리오 8세가 낙타를 타고 뒤로 앉은 채 로마에 입성하도록 강요했다. 그 후 그레고리오 8세는 로마, 파세로네, 살레르노의 라 카바 수도원에 잇따라 옮겨졌다가 1137년 라 카바 수도원에서 사망했다. 한편, 로마 교황청과 신성 로마 제국은 수년간에 걸친 협상 끝에 1122년 성직자 서임권 분쟁을 마무리짓는 [[보름스 협약]]을 체결했다. [[분류:대립교황]][[분류:1137년 사망]][[분류:리모주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