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기원전 2세기 집정관]][[분류:로마 공화국 집정관]][[분류:기원전 162년 사망]][[분류:로마 출신 인물]] [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기원전 2세기)] ||||<#800080> {{{#ffffff {{{+3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 }}}[br]{{{-1 [[라틴어]]: Gnaeus Octavius }}} }}} || ||<#800080> {{{#ffffff '''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162년 || ||<#800080> {{{#ffffff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800080> {{{#ffffff '''사망지''' }}} ||[[소아시아]] [[라오디케아]] || ||<#800080> {{{#ffffff '''지위''' }}} ||[[노빌레스]] || ||<#800080> {{{#ffffff '''국가''' }}} ||[[로마 공화정]] || ||<#800080> {{{#ffffff '''가족''' }}}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조부)[br]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아버지)[br][[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기원전 128년 집정관)|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아들) || ||<#800080> {{{#ffffff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800080> {{{#ffffff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800080> {{{#ffffff '''임기''' }}} || 기원전 165년 || ||<#800080> {{{#ffffff '''전임''' }}} ||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기원전 166년 집정관)|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br][[가이우스 술피키우스 갈루스(기원전 166년 집정관)|가이우스 술피키우스 갈루스]] || ||<#800080> {{{#ffffff '''동기''' }}} || [[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기원전 165년 집정관)|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 || ||<#800080> {{{#ffffff '''후임''' }}} || [[아울루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br][[퀸투스 카시우스 롱기누스(기원전 164년 집정관)|퀸투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생애 == [[노빌레스]] 가문인 옥타비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조부와 아버지 모두 그나이우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한다. 아버지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는 기원전 205년 [[법무관]]을 역임했다. 기원전 172년 [[조영관]]을 맡았으며,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 기간인 기원전 169년 [[가이우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와 함께 그리스 도시 국가들을 잇따라 방문해 "로마 관료들의 자의적인 강탈로부터 보호해주겠다는 원로원의 결의가 있었으니 [[페르세우스(마케도니아)|페르세우스]]와 손잡지 마라"고 권고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같은 해에 사망한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를 대신해 [[시빌라 예언서]]를 관리하는 10인 관리인의 일원이 되었다. 기원전 168년 함대 지휘관으로 선임되어 멜리베아 시를 함락시키고 사모트라케 섬으로 피신한 페르세우스 왕을 압박해 항복을 받아냈다. 이후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가 암피폴리스에서 마케도니아의 전후 처리를 발표했을 때 그리스어로 통역했다. 이후 로마로 귀환하여 파울루스가 [[개선식]]을 거행할 때 참석했고, 로마 최초의 코린토스식 기둥 건물인 포르티쿠스 옥타비아를 건설했다. 기원전 165년 [[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기원전 165년 집정관)|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에 따르면, 그는 [[팔라티노 언덕]]에 훌륭한 저택을 건설했고, 시민들은 이 저택에 깊은 인상을 받아 그에게 투표했다고 한다. 하지만 집정관으로서 어떤 행적을 보였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기원전 163년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오레스테스(기원전 157년 집정관)|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오레스테스]], 스푸리우스 루크레티우스와 함께 동방으로 가서 마케도니아의 정세를 살피고 [[카파도키아 왕국]]과 [[갈라티아]]간의 불화를 중재한 뒤 시리아로 가서 [[셀레우코스 제국]]이 기원전 188년에 체결된 아파메이아 평화 협약을 준수하는 지 살펴보고, 협약에서 정한 제한 조건에 따라 셀레우코스 함대를 불태우고 [[전투 코끼리]]를 처치했다. 이에 제국 시민들은 강한 적의를 품었다. 기원전 162년, 그는 [[라오디케아]] 시 체육관에서 열린 행사를 참관하던 중 렙티누스라는 인물에게 살해당했다. 살인자는 로마로 보내져서 처형되었고, 그는 라오디케아에 안장되었다. 이후 [[포로 로마노]]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고 전해진다. 아들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기원전 128년 집정관)|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는 기원전 128년 집정관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