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기원전 2세기 집정관]][[분류:로마 공화국 집정관]][[분류:로마 출신 인물]] [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기원전 2세기)] ||||<#800080> {{{#ffffff {{{+3 '''그나이우스 바이비우스 탐필루스''' }}}[br]{{{-1 [[라틴어]]: Gnaeus Baebius Tamphilus }}} }}} || ||<#800080> {{{#ffffff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800080> {{{#ffffff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800080> {{{#ffffff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800080> {{{#ffffff '''지위''' }}} ||노부스 호모(Novus Homo: 신참자) || ||<#800080> {{{#ffffff '''국가''' }}} ||[[로마 공화정]] || ||<#800080> {{{#ffffff '''가족''' }}} ||그나이우스 바이비우스 탐필루스(조부)[br]퀸투스 바이비우스 탐필루스(아버지)[br][[마르쿠스 바이비우스 탐필루스]](형제) || ||<#800080> {{{#ffffff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800080> {{{#ffffff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800080> {{{#ffffff '''임기''' }}} || 기원전 182년 || ||<#800080> {{{#ffffff '''전임''' }}} ||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기원전 183년 집정관)|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br][[퀸투스 파비우스 라베오]] || ||<#800080> {{{#ffffff '''동기''' }}} ||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 || ||<#800080> {{{#ffffff '''후임''' }}}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케테구스]][br][[마르쿠스 바이비우스 탐필루스]] ||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생애 == 고대 로마의 [[플레브스]] 집안인 바이비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조부는 그나이우스, 아버지는 퀸투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한다. 퀸투스 바이비우스 탐필루스는 기원전 219년 [[한니발 바르카]]의 [[사군툼 공방전]]에 항의하기 위해 카르타고를 방문하고 나중에 카르타고에 전쟁을 선포한 사절단의 일원으로 알려졌다. 형제로 기원전 181년 집정관을 역임한 [[마르쿠스 바이비우스 탐필루스]]가 있었다. 기원전 204년 [[호민관]]을 맡았다. 당시 [[감찰관]]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와 [[마르쿠스 리비우스 살리나토르]]가 서로를 비방하고 서로를 도덕적 문제로 더 높은 세금을 내야 하는 계층인 아에라리(aerarii) 계급으로 낮추려 하는 등 추태를 보이자, 그는 감찰관들의 추잡한 행동을 기소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원로원]]은 [[메타우루스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뒀던 두 사람을 처벌하지 않기로 했다. 기원전 200년 평민 [[조영관]]을 맡아 평민들의 위한 경기를 3차례 개최했다. 이듬해 [[법무관]]으로 선출된 뒤 갈리아 키살피나로 가서 군단을 지휘했다. 그는 아르미눔 근처에서 새 집정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기원전 199년 집정관)|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로부터 자신이 부임할 때까지 기다리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이를 무시하고 단독으로 인수브레스 족을 침공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포위되어 6,700명을 잃고 패주했다. 렌툴루스는 이 소식에 격분해 탐필루스를 규탄하고 로마로 쫓아보냈다. 기원전 186년 버려진 식민도시인 시폰토와 부생트 시를 재건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위원회의 일원이 되었다. 기원전 182년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된 뒤 그와 함께 리구리아를 임지로 부여받았다. 두 집정관은 성공적인 군사 원정을 펼쳤고, 원로원은 승리 소식을 접하고 하룻 동안 감사제를 드리기로 했다. 이듬해에도 전직 집정관 자격으로 작전을 이어가 리구리아 부족 전체를 복종시키는 데 성공하고, 기원전 181년 말 로마로 귀환한 뒤 파울루스와 함께 개선식을 거행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