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기원전 2세기 집정관]][[분류:로마 공화국 집정관]][[분류:로마 출신 인물]] [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기원전 2세기)] ||||<#800080> {{{#ffffff {{{+3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br]{{{-1 [[라틴어]]: Gnaeus Domitius Ahenobarbus }}} }}} || ||<#800080> {{{#ffffff '''생몰년도'''}}} ||미상 ~ 미상 || ||<#800080> {{{#ffffff '''출생지'''}}} ||[[이탈리아]] [[로마]] || ||<#800080> {{{#ffffff '''사망지'''}}} ||[[이탈리아]] [[로마]] || ||<#800080> {{{#ffffff '''지위'''}}} ||[[노빌레스]] || ||<#800080> {{{#ffffff '''국가'''}}} ||[[로마 공화정]] || ||<#800080> {{{#ffffff '''가족''' }}}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조부)[br]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아버지)[br][[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기원전 162년 집정관)|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아들)[br][[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기원전 122년 집정관)|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손자) || ||<#800080> {{{#ffffff '''직업'''}}} ||[[로마 공화정]] [[집정관]] || ||||<#800080> {{{#ffffff '''로마 공화정 집정관'''}}} || ||<#800080> {{{#ffffff '''임기'''}}} || 기원전 192년 || ||<#800080> {{{#ffffff '''전임'''}}}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메룰라(기원전 193년 집정관)|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메룰라]][br][[퀸투스 미누키우스 테르무스(기원전 193년 집정관)|퀸투스 미누키우스 테르무스]] || ||<#800080> {{{#ffffff '''동기'''}}} || [[루키우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 || ||<#800080> {{{#ffffff '''후임'''}}}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기원전 191년 집정관)|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br][[마니우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기원전 191년 집정관)|마니우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 ||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생애 == 고대 로마의 저명한 [[노빌레스]] 집안인 도미티우스 가문의 일원이다. [[수에토니우스]]가 전하는 전설에 따르면, 도미티우스 씨족에 속한 한 사람이 신성한 모습의 쌍둥이 청년을 만나서 그들에게 뺨을 어루만져지자 수염이 붉게 변했다. 이 인물은 아헤노바르부스(Ahenobarbus, "빨간 수염")라는 별명을 얻었고, 이것이 그의 후손들에게 통칭이 되었다고 한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그의 조부와 아버지 모두 루키우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 기원전 200년 재무관을 맡았고, 기원전 196년 [[조영관]]을 맡아 동료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와 함께 많은 공공 목초지를 무단으로 점유한 농부들을 고소해 벌금을 받아낸 뒤 파우누스(faunus) 신을 기리기 위한 신전을 세웠다. [[대 플리니우스]]에 따르면, 그는 [[포도주]]에 지나치게 중독된 어떤 부인에게서 지참금을 몰수했다고 한다. 기원전 192년, 그는 [[루키우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와 함꼐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이것은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가문 최초로 이뤄낸 성과였다. 이후 동료 집정관과 함께 갈리아 키살피나로 보내져 보이족과의 전쟁을 치러 그들을 진압한 뒤 이듬해 전직 집정관의 자격으로 갈리아 키살피나에서 통치를 행사했다. 기원전 190년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3세]]와의 전쟁에 참가해 [[레가투스(로마)|레가투스]](Legatus, 군단장)을 맡았다. 당시 소아시아로 건너간 로마군은 공식상으로는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가 지휘했지만, 실질적으로는 그의 형이자 [[한니발 바르카]]를 무찌른 로마의 영웅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지휘했다. 그러나 형 스키피오가 [[마그네시아 전투]] 직전에 중병에 걸려버렸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아헤노바르부스에게 동생 스키피오를 보좌하는 것을 넘어 군대를 실질적으로 통솔할 권한을 맡겼다고 한다. 이후 벌어진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로마군은 한때 좌익이 적 기병대에게 돌파당하는 위기를 겪었지만 안티오코스 3세가 몸소 로마군 진영까지 쳐들어가느라 전군을 통제하지 못하는 사이에 다른 측면이 붕괴되고 중앙의 보병대가 포위되자 그대로 달아난 덕분에 승리했다. 이후의 행적은 분명하지 않다.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 때 발칸 반도에 파견되어 여러 그리스 도시국가들에 [[페르세우스(마케도니아)|페르세우스]] 왕에 대항하여 로마에 군대와 물자 지원을 해달라고 요청하는 임무를 수행한 사절단에 참여한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에 대해 다수의 학자들은 그의 아들이라고 추정하나 일각에서는 그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아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기원전 162년 집정관)|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기원전 162년에 보결 집정관을 역임했으며, 손자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기원전 122년 집정관)|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기원전 122년 집정관을 맡았다. 이후에도 아헤노바르부스 가문은 집정관을 여러 차례 역임하며 로마 정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