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조선의 후궁]][[분류:구타로 죽은 인물]][[분류:1504년 사망]][[분류:초계 정씨]][[분류:무기에 죽은 인물]] [include(틀:다른 뜻1, other1=조선 인종의 후궁, rd1=귀인 정씨(인종),other2=조선 선조의 후궁,rd2=귀인 정씨(선조))] ---- [include(틀:조선의 후궁(환조 ~ 연산군))]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6E1D55, #89236A 20%, #89236A 80%, #6E1D55); color: #FFD400" '''조선 성종의 후궁[br]{{{+1 귀인 정씨 | 貴人 鄭氏 }}}'''}}} || || '''출생''' ||미상 || ||<|2> '''사망''' ||[[1504년]] [[4월 14일]]^^([[음력]] [[3월 20일]])^^ || ||[[한성부]] [[창경궁]] 뜰 || || '''본관''' ||[[초계 정씨]] || || '''휘''' ||금이(金伊) || || '''부모''' ||부친 - 정인석(鄭仁石, {{{-3 1424 ~ 1504}}}) || || '''배우자''' ||[[성종(조선)|성종]] || || '''자녀''' ||'''슬하 2남 1녀'''[br]장남 - [[안양군]](安陽君, {{{-3 1480 ~ 1505}}})[br]차남 - [[봉안군]](鳳安君, {{{-3 1482 ~1505}}})[br]장녀 - [[정혜옹주(성종)|정혜옹주]](靜惠翁主, {{{-3 1490 ~ 1507}}})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 [[성종(조선)|성종]]의 [[후궁]]. 아버지는 정인석(鄭仁石)이며, 어머니는 알려지지 않았다. 조부는 한성부윤을 지낸 정발(鄭發)이다. 슬하에 [[안양군|안양군 이항]], [[봉안군|봉안군 이봉]], 정혜옹주를 낳아 2남 1녀를 두었다.[* 딸이 하나 더 있었으나 요절하였다. 그래서 막내딸 정혜옹주가 사실상 장녀가 된다. ] == 생애 == === 성종의 후궁 === [[성종실록]]에서 정씨는 종3품 숙용, 또는 정3품 소용으로 등장하는데, "정씨의 동생을 영구히 양인으로 삼는다"는 전교가 있었다.[* [[성종실록]] 220권, [[성종(조선)|성종]] 19년 9월 18일 무인 2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ia_11909018_002|#]] ] 이때문에 그녀의 본래 신분은 미천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각종 사극에서 정씨를 왕비 간택에서 [[폐비 윤씨]]와 [[정현왕후]]의 라이벌 격으로 격상시켜놓은 것은 극적 재미 때문이지. 실제로는 미천했던 출신 신분 때문에 왕비가 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조선왕조의 왕비간택은 명문 벌열가문에서 뽑는다는 관행이 있었다. 유일한 예외가 [[숙종(조선)|숙종]] 대의 [[희빈 장씨]].] === 폐비 윤씨의 정적? === >지난 정유년 3월 20일에 "[[귀인 엄씨|엄 숙의]](嚴淑儀)가 정 숙용(鄭淑容)과 더불어 [[폐비 윤씨|중궁]] 및 [[연산군|원자]]를 모해(謀害)한다"는 글 두 통과 비상(砒礵) 약간과 압승책(壓勝冊) 한 권을 작은 상자에 담아 가지고 백저포(白苧布) 보자기로 싸서, 권 감찰(權監察)의 집 사람이라 일컫고 권 숙의(權淑儀)의 【권 숙의는 덕종(德宗)의 후궁으로, 여러 숙의를 총괄하여 다스렸다.】 집에 던졌는데, 권 숙의의 집 사람이 그 상자를 가지고 대궐에 나아와서 숙의에게 바쳤다. > >---- >《[[성종실록]]》 성종 10년 6월 5일 1477년(성종 8) 한 통의 투서가 [[의경세자|덕종]]의 후궁인 권 숙의의 집안에 떨어졌다. 투서의 내용은 "엄 숙의가 정 숙용과 더불어 중궁과 원자를 모해한다"는 것으로 깜짝 놀란 권 숙의가 익명서를 위에 바쳤다. 처음에는 정씨가 의심 받았지만, 당시 [[인수대비|대비전]]과 [[성종(조선)|성종]]은 곧 [[폐비 윤씨|왕비 윤씨]]의 자작극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투서는 폐비 윤씨의 [[동복형제|동복오빠]] 윤구의 아내, 여종 삼월, 사비를 [[창덕궁|창덕궁 구현전]]에서 문초한 결과 폐비 윤씨 측의 자작극으로 밝혀진다. [[http://sillok.history.go.kr/id/kia_11006005_004|#]] ] 이외에 여러가지 일로 믿음을 잃은 왕비는 폐출되어 사가로 쫓겨나게 된다.[* 이미 [[폐비 윤씨|왕비 윤씨]]가 쌓아놓은 업보들이 --장난 아니게 많이-- 있었다. 특히 윤씨는 [[성종(조선)|성종]] 앞에서 자신의 허물을 뉘우치고 연비, 즉 불로 팔을 지져서 맹세하는 의식을 하겠다고 맹세한 적도 있었는데 그 맹세가 다 거짓말이었다는걸 몸소 보여준 격이었다. [[http://sillok.history.go.kr/id/kia_11006005_004|#]] ] 사실 정씨가 귀인 엄씨와 함께 원자의 생모이자 왕비를 직접적으로 해치거나 모함한 일은 없다. 하지만 이 사건에 이름이 오르내렸기에 [[연산군]]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애초에 성종의 후궁이 한두 사람도 아닌데, 폐비 윤씨가 콕 찝어서 '엄 숙의'와 '정 숙용'이라고 투서에 썼다.] === 비참한 최후 === [[연산군]]은 귀인 정씨와 [[귀인 엄씨]]를 [[창경궁]] 뜰에 묶어놓고, 정씨의 소생인 [[안양군]]과 [[봉안군]]을 잡아와, 그녀를 마구 때리게 하였다. 당시 날이 어두워 안양군은 어머니임을 짐작하지 못하고 마구 때렸으나, 봉안군은 어머니임을 알아차리고 때리지 않고 흐느꼈다. 이를 지켜 본 연산군은 더욱 화가 나 그녀들을 몽둥이로 마구 때려서 살해하였다. 귀인 엄씨와 귀인 정씨가 숨이 끊어지고도 연산군의 매질은 그치지 않았으며, [[젓갈]]로 담가 산과 들에 뿌렸다.[* 연산군일기 52권, 연산 10년 3월 20일 신사 5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ja_11003020_005|#]] ] >전교하기를, "안양군 이항(李㤚)에게 길든 말 한 필을 주라."하였다. 항이 지난밤에 명령대로 그 어머니를 장 때렸기 때문에 상을 준 것이다. >---- >《[[연산군일기]]》 연산군 10년 3월 21일 심지어 연산군은 안양군에게 [[패륜|어머니를 잘 때렸다]]고 상을 주기까지 하였다. === 사후 === 안양군은 [[충청도]] [[제천시|제천]]에, 봉안군은 [[경기도]] [[이천시|이천]]으로 유배를 갔는데 모두 풀려나지 못하고 유배지에서 죽었다. 그녀의 막내딸 정혜옹주마저 15세의 나이로 [[황해도]] [[배천군|배천]]으로 유배를 갔는데, 당시 정혜옹주는 [[옹주]]의 작위를 박탈당해서 "한기의 처"라고 불렸다.[* 정혜옹주가 유배간 지 약 6개월 후, 귀인 정씨의 유일한 사위이자 정혜옹주의 남편인 [[부마]] 청평위 한기(韓紀)도 [[고문]]을 당하는 등 고생을 겪었다. ][* 왕녀가 직첩을 빼앗기고 '(남편이름)의 처'로 불리는 일은 후대에도 일어난다. [[효명옹주]]가 '김세룡의 처'로 불렸고, [[화완옹주]]가 '정치달의 처'로 불렸다. 연산군의 딸 [[휘신공주]]도 직첩을 빼앗겨 '구문경의 처'로 불렸다.] 연산군은 [[후궁]]의 직첩을 빼앗은 후에 서인으로 삼고, 하사받은 노비 및 전지를 빠짐없이 찾아 환수하였다. 또한, 부왕의 후궁으로 취급하지 않고 그 아들들 역시 종친으로 보지 말 것을 명하였다.[* 연산군일기 52권, 연산 10년 3월 26일 정해 1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ja_11003026_001|#]] ] 뿐만 아니라 부모와 형제마저 연좌시켰다. 이때문에 그녀의 아버지 정인석과 배다른 형제들도 비참한 최후를 맞았는데, 정인석은 아예 뼈를 가루로 만들어 강 건너로 날렸다.[* 연산군일기 57권, 연산 11년 1월 26일 임자 4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ja_11101026_004|#]] ][* 이때 정인석은 나이 80세로 법에 따른다면 연좌되지 않아야 마땅한데도 연산군은 법에 따를 수 없다고 하여 연좌되었다. ]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이 일어나면서 왕위에 오른 [[중종(조선)|중종]]이 직첩을 회복시켰고, 예를 갖추어 다시 장례를 치러주었다. == 대중 매체 == [[폐비 윤씨]]를 모함한 [[후궁]]으로 유명해서인지, [[성종(조선)|성종]]과 [[연산군]] 시기를 다룬 사극마다 [[귀인 엄씨]]와는 쌍둥이처럼 함께 등장한다. * 《[[설중매#s-4|설중매]](1984)》 - 배우 [[김해숙]] * 《[[한명회(드라마)|한명회]](1994)》 - 배우 정유진 * 《[[장녹수(드라마)|장녹수]](1995)》 - 배우 정복임 * 《[[왕과 비]](1998)》 - 배우 [[김정난]] * 《[[왕의 남자]]》(2005, 영화) - 배우 하희경 * 《[[왕과 나(드라마)|왕과 나]](2007)》 - 배우 윤혜경[* 왕과 나에서는 실제와 다르게 사약을 마시려고했으나 마시지 못하겠다고 하자 연산군에 의해 강제로 사약을 쏟아부어 사사되었다] * 《[[인수대비(드라마)|인수대비]](2011)》 - 배우 정요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