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대만 관련 문서)] ||<-2> '''{{{+1 國民大會}}}[br]국민대회[br]National Assembly''' || ||<-2> [[파일:중화민국 국민대회 휘장.svg|width=200]] || || '''설립일''' ||[[1948년]] [[4월]] || || '''공식 사이트''' ||[[http://www.na.gov.tw/|[[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width=25]]]][* 2017년 10월경 홈페이지가 잠시 폐쇄되었으나 이내 복구되었다.] || [목차] [clearfix] [[파일:3ew3er23r52423434.jpg|width=500]] [[1946년]] 당시 [[난징]]에 있었던 국민대회당. [[1960년]]부터 장쑤성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파일:9529003732_81991c0e6b.jpg]] [[1950년대]]와 [[1960년대]] 국민대회당으로 쓰였던 [[타이베이]] 시의 중산당. 중화민국 정부가 [[일본군]]으로부터 [[대만일치시기|대만]]을 인계받은 장소이기도 하며, 해당 장소에는 이를 기념하는 비석이 있다. [[파일:Chung-Shan_Building_and_Baishou_Bridge_20160320.jpg]] 1972년부터 2005년 기능 정지까지 회의장으로 쓰였던 [[양밍산]] 중산루. == 개요 == [[중화민국]]([[대만]])의 최상위 [[헌법기관]]. 다만 현재는 기능이 정지되어 있다. == 상세 == === [[국부천대]] 이전 === 일종의 국회형 [[국민투표]]로서 [[대만 총통|총통]] 및 [[대만 부총통|부총통]] 선출과 파면, [[대만 헌법|헌법]]의 개정, [[입법원]]이 제출하는 헌법 수정안 의결, 입법원이 제출하는 영토 변경안 의결, 입법원이 제출하는 총통, 부총통의 탄핵안 의결, 총통이 임명하는 각종 인사에 대한 동의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1946년에 [[대만 헌법|중화민국 헌법]]을 입법하면서 1947년에 선거가 이루어져 1948년 4월에 처음 소집되었는데 이 때는 [[기초자치단체]]([[시(행정구역)|市]][[현(행정구역)|縣]][[구(행정구역)|區]])와 [[소수민족]]([[몽골족]]+[[위구르족]]+[[티베트족]]+[[후이족]]) 및 해외거주 화교들과 직능단체들을[* 農會(농업회의소), 林會(임업회의소), 漁會(어업회의소), 商會(상업회의소), 工會(공업회의소), 鑛會(광업회의소), 교육회, 기자회, 의사협회, 약사협회, 간호사협회, 변호사협회, 회계사협회, 건축사협회, 대학교수회 ] 대상으로 [[지역구|구역대표제]]([[소선거구제]]) 및 [[전국구|직업대표제]]([[대선거구제]])로 선출했다. 최초 선출인원은 3,045명으로 지역구 2,177명 몽골+티베트 97명, 소수민족 34명, 해외화교 65명, 직능단체 487명, 내지생활습관특수국민(內地生活習慣特殊國民, [[후이족]]) 17명이 정원이었다. 실제로는 여러가지 이유로 선출인원을 모두 선출하지 못하고 지역구에서는 2,141명만 선출되는 등 전체 2,963명만 선출되었다. 지역구는 기본적으로 각 현 당 1명을 선출하였으나 32개 인구 과다 지역의 경우 2명을 선출하였다. 국민대회 대표의 임기는 6년이었다. 그러나 [[선거]]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이런저런 문제점이 드러나 공정한 [[선거]]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또한 3당 훈정(三黨訓政)에 참가한 3대 합법정당([[중국국민당]]과 [[중국 청년당]]과 [[중국 민주사회당]])만 참가했으며, [[중국공산당]]과 [[중국민주동맹]]은 선거에 불참했다. 총통과 부총통은 국민대회 [[간선제]] 선출이었기에 1대 선거에서 2,430표를 얻은 [[장제스]]가 90%의 득표율로 무난하게 당선된다. === [[국부천대]] 이후 === 그러나 [[중국공산당]]에 밀려 점점 대륙에서 세를 잃어가는 [[중국국민당]]은 '공비의 반란을 토벌한다'는 목적으로 [[동원감란시기임시조관]]을 제정해 헌정을 사실상 중단했고, 국민당 정부는 [[국부천대|대만으로 피난했다.]] 공산당은 대만 침공을 벼르고 있었고, [[중국인]]들은 물론 [[미국]] 등의 외국에서도 국민당은 완전히 끝났다는 의견이 대세였기 때문에 수많은 국민대회 대표들이 공산당에 투항하거나 협력했다. 따라서 국민대회 대표의 절반 정도만이 국민당을 따라 대만으로 갔다. [[1947년]] 선출된 국민대회 대표 2963명 가운데 [[국부천대]] 때 국민당 정부를 따라와서 1954년 총통선거에 참여한 국민대회대표는 1573명이었다. 1948년에 선출된 국민대회 대표의 임기가 만료되는 1954년이 다가오자 [[사법원]][* 헌법재판소+등기소+법원행정처 직무를 동시에 다루는 종심법원. 대만(중화민국)의 대법원은 [[대만 최고법원|최고법원]]이라고 하여 사법원의 하위 기관이다.]에서 헌법 28조 2항을[* 매 국민대회대표의 임기는 차기 국민대회개회일에 만료된다.] 근거로 "다음 선거를 할 수 없는 상태에선 현임 국민대회 대표의 임기가 계속된다."고 해석하여 아예 임기를 무기한 연장했다. 이미 1948년 선거로 국민대회 대표들을 장제스 지지자로 채워놨으니, 국민대회는 [[장제스]]가 살아있는 한 그를 총통으로 뽑아 그의 독재를 뒷받침하는 데 악용되었다. 1대 총통 선거에서는 3당에서 모두 후보를 냈고, 2대 선거에서는 [[중국국민당]]과 민주사회당만 후보를 낸 가운데 두 선거 모두 장제스가 90%와 96%로 당선되었다. 국민대회에서 총통을 선출하던 초창기 규정은 1차 투표에서 전체 의석의 과반 득표자가 나오면 결선 투표 없이 당선이었는데, 2대 선거에 참여한 국민대회 의원은 1,573명으로 전체 의석 수 3,045명의 절반을 살짝 넘겨서 1차 투표에서 장제스가 압도적인 득표율을 얻었으나 2차 투표까지 가게 되었다. 이런 상황이 발생하자 형식적으로 선거처럼 보이던 총통선거도 1960년부터 1990년 총통 선거까지는 국민당 후보만 단독 출마한 가운데 국민대회를 통해 간선제로 치러졌다. 시간이 갈수록 대표들이 하나씩 둘씩 세상을 떠나 1960년 총통 선거엔 1576명, 1966년엔 1488명이 참여하는등 계속 줄어들다가 1969년부터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서만이라도 선거를 했지만, 이마저도 1기 국민대회 대표의 보궐선거 및 증원선거였을 뿐 국민대회를 전면적으로 새로 구성한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타이완성]]과 [[푸젠성(대만)|푸젠성]] 일부, 해외 선거구에서만 선거를 하다보니 1948년 최초로 구성할 당시의 3045명을 다시 채울 수는 없었고 선거가 불가능한 지역의 대표가 여전히 살아있는 한 임기를 유지하다가 그들이 세상을 떠나면 그 지역의 대표가 공석이 되면서 인원은 갈수록 줄어들었다. 1972년 총통 선거엔 1374명, 1978년 선거엔 1248명, 1984년엔 1064명, 임기 종료 직전의 1990년 마지막 총통 선거 당시에는 752명만이 남게 된다. 또한 당시 대만은 신규 정당의 설립을 막아서 여당인 [[중국국민당]]과 중국 청년당, 중국 민주사회당 등 관제야당을 제외한 나머지 후보는 모두 무소속이었다. [[1986년]]의 보궐-증원선거 이후에야 정당 설립이 가능해져 이 때 무소속으로 당선된 의원 일부가 [[민주진보당]]을 창당했고 1989년의 마지막 보궐-증원선거에는 이들이 참여하여 관제야당을 제치고 2당이 되었다. === 민주화 이후 === [[장징궈]] 정부때부터 종신의원 제도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지만 본격적인 개혁은 [[리덩후이]] 집권 시기 때 이루어졌다. 우선 리덩후이는 집권한 뒤로는 헌정복귀를 내세우며 종신의원들의 자발적인 퇴직을 권유했지만 종신의원 대다수가 퇴직을 거부하며 계속 의원직을 역임하려고 했고, 이들이 의회에서 상당한 세를 확보했기 때문에 개혁이 지지부진했다. 이에 국민들이 개혁지연에 반발하면서 종신의원 제도 개혁이 힘을 얻게 되었다. 이에 따라 [[1991년]]에 동원감란시기임시조관이 폐지되고 사법원에서도 헌법해석을 수정해 국민대회 대표의 임기를 [[1991년]] [[12월 31일]]까지로 못박음으로써 44년만에 직접선거 총선이 시행되었다. 헌법 수정이 이루어지며 임기가 4년으로 개편됨에 따라 [[1996년]]에도 선거가 치러졌다. 국민대회의 선거 방식도 [[중선거구제|중선거구]](지역구 및 [[대만 원주민|원주민]] 대표) 및 [[비례대표]] 병립으로 바뀌었고, 권한과 기능도 크게 개편되어 다른 나라에서의 [[상원]]과 비슷한 기능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본래 국민대회에서 치르던 [[대만 총통|중화민국 총통]]/[[대만 부총통|부총통]] 선거가 [[직선제]]로 개편되고, [[입법원]]과의 기능중첩 문제가 제기되었으며, 또 오권의 우위에 있는 기관인만큼 [[동원감란시기임시조관]]을 제정한 것처럼 언제든 다시 헌정을 무력화할 가능성이 있어[* 국민대회는 자체적으로 헌법 수정안을 입법하고 결의할 수 있었다. 따라서 불순한 정치적 의도를 가진 세력이 국민대회를 장악할 경우, [[나치당]]이 [[수권법]]을 제정한 것과 비슷한 방법으로 국민대회가 헌법을 갈아엎고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무너뜨릴 가능성이 존재한다.] 국민대회의 존재 자체에 대한 비판 여론도 거세졌다. === 임무형 국민대회 === 그래서 [[2000년]]에는 국민대회 선거가 치러지지 않고[* 이것이 [[천수이볜]]의 발목을 잡기도 했다. 왜냐하면 2001년과 2004년 입법원 선거에서 민진당이 득표율에서 국민당을 이기기는 했지만 중선거구제라서 여소야대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기능 또한 축소되어 총통이 임명하는 각종 인사에 대한 동의의 기능이 입법원으로 이전되었다. 그리고 국민대회는 탄핵, 영토 변경, 헌법 수정 등의 상황이 발생할 때 3개월 이내에 선거를 하여 이에 대해 의결하고 해산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이를 '임무형 국민대회'라 한다.[* [[페루]], [[칠레]],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볼리비아]] 등 여러 나라에서 [[개헌]]을 할 일이 있을때 기존 의회와 별도의 의회를 구성하곤 하는데 이것의 대만판이라 할수있다.] 이 임무형 국민대회 방식으로 정당명부 비례대표제에 기반해 [[2005년]] 국민대회 선거가 치러지고[* 이 마지막 국민대회 선거에선 [[범록연맹]]이 낙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이미 거대양당(민진당과 국민당)이 국민대회 선거 이전에 헌법 개정에 대한 합의를 끝마쳤기 때문에 누가 다수가 되든 별 상관은 없었다.] 국민대회가 소집되었다. 이 국민대회에서 헌법을 수정하여 영토 변경안 의결, 총통/부총통 탄핵안 의결, 헌법 수정안 의결의 기능을 모두 입법원으로 넘기고[* 총통/부총통 선거는 이미 국민대회 간선에서 직선제로 바뀐 상태였고, 헌법 개정과 영토 변경은 입법원이 의결하고 국민투표를 거치는 것으로 수정되었으며, 그 외에 인사 동의권 등과 같이 국민대회가 수행하던 다른 역할들은 모두 입법원이 결의하는 것으로 수정한 뒤 국민대회의 조직과 운영을 규정한 헌법 규정은 적용을 중지하였다.] 입법원 선거제도를 소선거구 비례대표 병립제로 개편한 다음 해산했다. 이 때 국민대회의 모든 권한이 입법원으로 넘어갔기 때문에 더 이상 소집할 이유가 없어졌다. 헌법 수정이 미국처럼 수정조문을 추가하는 방식이고 수정의 명분이 '[[양안통일]] 이전에 국가의 필요에 응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에 이론상으로는 헌법이 다시 개정되거나 양안통일 이후 수정조문이 폐지된다면 부활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현실적으로 대만 주도의 양안통일 가능성이 없는 이상 폐지된 것이나 다름없다. 실제로 완전 폐지되지 않고 [[사문화]]된 채로 남은 것은, '''국민대회가 중화민국의 건국 이념인 [[오권분립]] 이론에 따른 헌법 기관이라서 [[중국]]과 정통성을 다투는 [[대만]]으로서는 그 상징성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기타 == * [[1992년]] 이전의 국민대회와 비슷한 성격의 기관으로 [[중국]]의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와 [[대한민국]]의 [[통일주체국민회의]]에 비교되기도 한다. [[입법원]]이나 [[대한민국 국회]]와 달리 국민대회, 전인대, 통일주체국민회의는 가끔씩 개최되는 것도 그렇고 국가 최고 의결 기구 역할을 했으며 모두 정권의 꼭두각시 노릇을 했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 대만의 국민대회는 공식적으로는 폐지된 것이 아니므로 국민대회와 관련된 법은 아직도 사문화된 채로 남아 있다. 2012년에 한 의원이 입법원에 이들 법에 대한 폐지 법안을 낸 적이 있는데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회기가 끝나 자동 폐기되었다. 유사한 역할을 하던 대한민국의 [[통일주체국민회의]]선거법과 통일주체국민회의법은 정치권의 공감대 하에 폐지되었지만, 중화민국 국민대회는 국가 건국 이념의 근간이기에 정치적 합의에 의한 폐지 가능성은 전혀 없다. 이 법을 발의한 의원은 소수정당이자 [[대만 독립]]을 지지하는 [[대만단결연맹]] 소속 의원이었으며, 현재는 원외정당이다. * 국민대회는 [[국부천대]] 이후 1960년대까지 타이베이 중산당에서 개최되었다가, 1970년대부터 가장 최근에 열린 2005년 국민대회까지 타이베이 외곽 [[양밍산]] 산기슭에 세워진 [[https://www.travel.taipei/ko/attraction/details/1026|중산루(中山樓)]]에서 개최되었다.[* 쑨원의 초상화가 그려진 대만 화폐 100위안의 뒤쪽 도안으로 그려져있는 건물이다.] 이 곳은 외국인 귀빈 접대나 국가 행사 개최지 등으로도 사용되었다. 국민대회의 활동이 사실상 종료된 후에는 사적지로 지정,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 역사적으로 볼 때 굉장히 엄숙하고 아무 발언도 하지 못하는 형식적인 기관에 가깝지만 대만이 민주화되기 시작한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까지는 국민대회도 공성전이 벌어지는 등 나름대로 흥미진진한(?) 장면들이 많이 나왔다. * [[https://www.youtube.com/watch?v=BXNueQTXxI8&t=7s|1991년 4월 9일 중화텔레비전 보도]] [[민주진보당]] 대표들이 발언권을 계속 가지면서 본회의 의장단 선출 방법 표결이 지연되자 여당인 [[중국 국민당|국민당]] 사륭성 서기장이 회의 종료 30분 전에 35명의 서명을 받은 토론 중단안을 제출, 강제 표결하자 --한마디로 날치기-- 몸싸움이 벌어졌다. --[[쑨원|아버지가]] 지켜보고 있다-- *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4/1930156_19434.html|1994년 6월 7일 MBC 뉴스데스크 보도]], [[https://youtu.be/Ou5eFvneCMU|중화텔레비전 보도]] 여성 의원들이 서로 흉을 봤다는 사적인 이유로 국민대회장에서 패싸움을 벌이고 말리던 국민당 소속 여성 의원 마아이전(馬愛珍)이 심장 발작으로 실려가는 일까지 터졌다. 발언하던 의원은 국민당 궈쑤춘(郭素春) 의원[* 아들은 [[신베이시 제1선거구]] 국민당 소속 입법위원인 훙멍카이(洪孟楷)다.]이고 궈 의원의 뺨을 때린 의원은 민진당 쑤즈양(蘇治洋)[* 민진당 쑤즈펀(蘇治芬) [[윈린현]] 제1선거구 입법위원의 언니다.] 의원이다. == 관련 문서 == * [[오권분립]] [[분류:대만의 정치]][[분류:중화민국의 정치]][[분류:나라별 의회]]